6 · 25전쟁이 발발한 지 60주년을 맞았다. 1953년 정전협정으로 총소리는 멈췄지만 이 나라 강토는 초토화됐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세계 최빈국'이란 딱지뿐이었다.

1954년 전쟁의 참화가 채 가시지 않은 때 축구국가대표팀은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았다. 선수들의 에너지원은 팬들이 들고 온 계란꾸러미가 전부였다. 외상으로 단복을 해 입고 기차와 미 군용비행기를 얻어 타고 60여시간 만에 스위스에 도착했다. 시차 극복도 못한 채 헝가리에 0-9,터키에 0-7로 참패했다. 춥고 배고파 높기만 하던 보릿고개처럼 세계의 벽도 넘기가 힘들었다.

여자축구의 시작도 남자축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자축구는 1990년대 초 일본에 1-13으로 무참히 무너졌고 대만이나 태국,말레이시아에도 밀렸다.

남자축구와 달리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녀들이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을 주었다. 독일에서 열리고 있는 FIFA U-20 여자 월드컵에서 선전하며 세계 여자축구의 중심에 우뚝 선 것이다.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2002년 한 · 일 월드컵에 이어 이번엔 대한민국의 어린 낭자들이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이들의 성공을 보면서 문득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에서 승전보를 알려왔던 남편(고 서영주 선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육상의 넓이뛰기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하늘 높이 펄럭이며 오르고 애국가가 도쿄 하늘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60만 재일교포 앞에서 그의 꿈이 이뤄졌다.

TV가 없었던 시절인지라 임택근 아나운서의 힘찬 멘트는 모든 국민을 라디오 앞에 모이게 했고 교포도,고국의 우리도 목청껏 함성을 질렀다. 국교 정상화가 안 된 일본의 우승 후보인 소노다 선수를 제쳤다는 감동에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자신감을 얻었다.

언제나 인기 없는 종목의 선수들은 남몰래 더 땀을 흘려야 하고 더 큰 희생을 치르기 일쑤다. 거리 응원이 없었는데도 최선의 결실을 이룬 여전사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이 돌아오는 날 우리 모두 아낌없는 박수로 맞아주자.그리고 비인기란 그늘 속에 오늘도 훈련에 임하는 더 많은 선수들을 돌아다볼 때다.

박지연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