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 수강생서 1000억弗 굴리는 '투자 귀재'로
1989년 6월4일.대학생 리루는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에 서 있었다. 그와 함께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노동자들 사이로 탱크와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군중들은 죽음을 각오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총탄 세례가 시작됐다. 수백명이 피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간신히 몸을 피한 리루는 그 길로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로부터 21년 뒤.리루(44)는 '오마하의 현인(賢人)'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80)의 후계자로 급부상했다. '민주화의 상징에서 자본주의 아이콘으로의 화려한 변신'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0일 버핏의 투자회사 벅셔해서웨이의 찰스 멍거 부회장의 말을 인용해 "벅셔해서웨이의 펀드 매니저인 리루가 여러 명의 경쟁자들과 함께 회사를 이끌어갈 차기 리더그룹으로 떠올랐다"고 밝혔다. 멍거 부회장은 "리루가 버핏 은퇴 이후 그의 역할을 대신할 최고투자책임자(CIO)가 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라고 말했다. 다음 달로 80세가 되는 버핏의 후계자로 리루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버핏의 낙점이 임박했음을 보여준다고 월지는 분석했다.

버핏의 명목상 후계자로 버핏의 아들인 하워드 버핏이 비상임 회장에 내정돼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회사를 움직일 최고경영자(CEO)와 CIO는 아직 지명되지 않았다. 그동안 벅셔해서웨이의 자회사인 미드아메리칸에너지의 데이비드 소콜 회장과 토니 나이슬리 가이코 회장 등 2~3명 정도만 후보군으로 거론됐을 뿐이다. 아시아인인 리루가 물망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와 버핏의 첫 만남은 1993년 컬럼비아대 재학시절 특강강사와 수강생으로 시작됐다. 노후자금을 마련할 요량으로 버핏의 투자 특강을 들은 것이 인연이 됐다. 그는 "금융시장을 믿지 않았던 내가 투자에 눈을 뜬 계기"라고 말한다. 때마침 불어닥친 정보기술(IT) 붐 덕에 리루는 졸업 무렵인 1996년 이미 평생을 먹고 살아도 될 만큼의 자금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1998년 사설 투자사를 설립한 그는 고객들과의 주말 친목 모임에서 만난 멍거 부회장과 공동펀드를 설립하는 등 돈독한 신뢰를 쌓으면서 버핏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버핏에게 당시엔 무명이었던 중국 전기자동차 업체 BYD 지분 10%를 2억3000만달러에 사들이도록 설득한 사람이 바로 리루와 멍거다.

이 지분 가치는 2년간 15억달러로 6배 이상 폭등했다. 버핏이 특강 제자였던 리루를 투자 파트너로 신임하기 시작한 계기다. 이후 벅셔해서웨이에 합류한 리루가 관리하고 있는 자산 포트폴리오 규모는 1000억달러에 달한다.

실제 버핏은 직접 그에 대한 각별한 신임을 드러내기도 했다. "누구나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리루는 사람들이 BYD를 모두 팔아치울 때 고집스럽게 주식을 사모아 성공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가치를 보는 사람임을 말해준다. "(버핏)

리루가 후계자 그룹에 포함된 것만은 분명하지만,단독 지명은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게 월지의 분석이다. 버핏이 '집단지도체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버핏은 월지에 "나는 지금도 투자 매니저들의 아이디어를 듣는 것이 즐겁지만 그들이 서로 경쟁하기보다는 함께 그룹으로 투자하는 팀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내가 이 자리에 있을 때 CIO 한 명을 추가로 확보하는 것을 생각 중"이라고 말해 CIO 자리에 두 명 이상을 지명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