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다. 내 주위의 직장인 친구들도,단골 동네 병원도,동네 미장원도 모두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가 휴가 기간이란다. 소설가는 휴가가 없는 직업이다. 일상의 시간 단위는 사계절이나 열두 달이 아니라 원고 마감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왜 하필 이렇게 복잡할 때 가? 고속도로는 무척 막히고 여행지 방값도 제일 비쌀 텐데." 유년시절 이후로 성수기의 여름휴가라는 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바보 같은 질문에 친구가 대답했다. "왜냐고? 그냥. 남들 다 갈 때 가야지.사무실 눈치도 보이고.남들 하는 대로 하는 게 안전하잖아."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강원도까지 갔다 오려면 고생깨나 하겠다고 그녀가 투덜거렸다.

그날 밤 텔레비전 뉴스는 피서객으로 가득 찬 경포대와 해운대 백사장을 비춰주었다. 방송카메라가 형형색색의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를 휙휙 지나갔다. 나는 혹시 친구 얼굴이 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람들로 꽉 찬 해변은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이고,바다는 마치 일요일 한낮의 공중목욕탕처럼 바글거린다. 저기서 휴식이 될까? 그런 의문이 고개를 들지만 "다 갔다 왔는데 우리 애들만 빠질 순 없잖아. 애들한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라고 말하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궁금증을 접는다.

여름휴가 같은 건 떠나지 않는 소설가의 이상한 시간 감각을 뒤흔드는 전화가 유독 이즈음 자주 걸려온다.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소개해 달라는 언론사의 전화다. 어제도 같은 부탁을 받았다. 어떤 종류의 책을 원하시느냐고 물었더니,휴가지에서 부담없이 읽도록 적당히 가벼우면서도 재미있고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할 만한 내용의 책이 없느냐고 되묻는다.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책이라니.그런 것이 현실에 존재할 리 없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우선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훑어보기로 했다. 불특정 다수인 독자들을 만족시키려면 아무래도 그 편이 안전할 것 같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여름날에 보았던 풍경이 떠오른다. 한 권의 소설이 한창 베스트셀러 순위의 수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키던 때였다. 일 때문에 우연히 제주도에 가게 됐는데 비행기 옆 좌석의 청년도,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선탠을 즐기던 아가씨도,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중년여성까지,그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바로 그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참 재미있는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곧 설명 못할 무서움이 엄습했다. 휴가의 파트너로 요즘 가장 인기 있다는 책을 선택하면서 어쩌면 그들 역시 내심 안도의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비슷비슷한 장소에서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비슷비슷한 휴가를 보내면서 느끼는 감정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왜 그토록 천편일률적이고 빤하게 사느냐며 그 누가 힐난할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남과 비슷하게 사는 법 말고는 배운 적도 없었고 배울 기회도 없었다. 노는 것에 대한 훈련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1년에 단 며칠뿐인 여름휴가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간으로 만들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적 차원에서 '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정립해볼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쉴 때도 마치 일하는 것처럼 '끝을 보겠다'며 전투적인 강박감에 시달리기보다는, 때론 게으른 물고기처럼 설렁설렁 시간 속을 헤엄치며 보내는 일도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 혼자만 다르다고 불안해하지 않는 휴가,불안해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더 넓게 퍼지면 좋겠다. 진정 잘 노는 방법이 그리워지는 무더운 한여름이다.

정이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