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미국의 전 대통령 빌 클린턴이 세계 언론에 등장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강연하며 소개한 자신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 때문이다.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들'이란 뜻인데,같은 제목의 미국 영화가 2007년 나오기도 했다. 시한부 생명을 살게 된 부호(잭 니컬슨)와 자동차 수리공(모건 프리먼)이 어울려 온갖 모험과 구경과 경험을 펼쳐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클린턴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B급 리스트에는 킬리만자로 등산과 마라톤을 들었지만,'꼭 해보고 싶은' A급 리스트 첫 대목에는 손자를 안아보는 것을 들었다. 이제 겨우(?) 만 64세(1946년 8월생)인 그는 큰 수술도 두어 번 받았다지만,손자 보는 것은 별 문제 없으리라는 언론 보도였다. 엊그제 그의 외동딸 첼시가 200만달러짜리 호화판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어찌 살 것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경우로는 클린턴보다 꼭 30살이 더 많은 중국 공산당 원로 완리(萬里)의 경우가 재미있다.

역시 지난주 국내 일간지에 보도된 그의 소개는 이런 내용이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내고 1993년 은퇴한 그의 노년을 그 신문은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16년생인 완리는 '5불주의(五不主義)'와 '3대 생활수칙'을 실천하고 있다. 1993년 3월31일 정계에서 은퇴한 뒤 그는 자리를 맡지 않고(不在其位),정치를 도모하지 않고(不謀其政),세상사를 묻지 않고(不問事),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고(不管事),일을 만들지 않는(不惹事) 오불주의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

이 국내 신문 기사에 나는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첫 두 구절,즉 '자리를 맡지 않고(不在其位),정치를 도모하지 않고(不謀其政)'라는 표현은 원래 '논어'(태백편)에 나오고,덩달아 '명심보감'에도 나오는 유명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 두 구절이 4자씩인 데 반해 다음 나오는 셋은 3자짜리여서 한자식 표현으로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기사의 원문인 '인민일보' 국제판을 찾아보았다. 정말로 이 기사는 실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인민일보'의 원문 기사는 완리의 일생을 길게 소개하면서 특히 그가 큰아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자립 훈련시켰던가 등을 소개한다.

여하간 이 기사에 의하면 그는 은퇴 이후 '3불주의'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일뿐이지,'5불주의'란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논어'에도 나오는 대로,그는 자리를 떠나면서 그 자리에 있을 때 휘두르던 권력에서 완전히 손을 놓고(不在其位 不謀其政),세상사에 대해 묻지도 않고,관여도 않고,일을 만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즉 '불문사(不問事) 불관사(不管事) 불야사(不惹事)'의 '3불주의'를 완리는 지켜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은퇴 후에는 테이프 끊으러 다니지도 않고,명예직도 사양하고,남의 글에 서문 따위를 써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장이나 작년 10월의 건국 60주년 기념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후진타오 국가주석 등의 초청을 "아무리 생각해도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며 굳이 사양했다.

나이 들며 사람은 누구나 못다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자신의 버킷 리스트를 갖고 있다. 그것을 잘 관리하는 지혜가 나이 들수록 더욱 절실하다.

60대 클린턴의 버킷 리스트를 노욕이랄 것은 없겠고,90대 만리의 3불주의를 대단히 도통한 것으로 치켜세울 생각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 우리나라에서는 늙어서도 여전히 기운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도 탈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박성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