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부품업체 A사 K사장은 2006년 9월 공장 이전을 위해 국내 모 시중은행에서 2억4500만엔을 대출받았다. 당시 원 · 엔 환율은 100엔당 798원으로 19억5000만원에 상당하는 금액이었다. K사장은 엔화 대출금리가 연 2.5%로 6.5%였던 원화 대출금리보다 훨씬 낮아 매력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작년 6월 원금 상환시기가 되자 사정은 돌변했다. 원 · 엔 환율이 3년 새 65.8%가량 올라 100엔당 1323원53전으로 치솟은 것.대출 당시 19억5000만원이던 원금이 32억7565만원으로 불어났다. 도저히 갚을 엄두가 안난 K사장은 작년 6월 은행에 원금의 0.5%를 수수료로 내고 3개월간 원금 상환연장을 받았다. 그는 "두 차례 분할상환을 했는데도 아직 갚아야 할 돈이 30억원 넘게 남았다"고 울상을 지었다.

휴대폰 부품업체 B사 L사장은 엔화 환율을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3개월마다 이자 변제일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는 2007년 5월 운전자금용으로 2억7000만엔을 빌렸다. 당시 환율은 100엔당 780원,이자는 연 2%대였다. 그러나 2008년부터 원 · 엔 환율이 상승하면서 갚아야 할 돈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작년 3월 원 · 엔 환율이 1600원대까지 치솟았을 때에는 2007년(21억원)에 비해 원화로 환산한 대출원금(43억원)이 두 배로 늘었다. 거래은행이 이자만 받고 상환일자를 연기해줬지만 작년 하반기에도 원 · 엔 환율이 하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상환 압박은 더해만 갔다

중소기업 사장들이 한여름 '엔화 공포'에 떨고 있다. 2006~2007년 엔화가 쌀 때 대출을 받은 기업들 중 상당수가 최근 원 · 엔 환율 급등으로 갚아야 할 원금이 급격히 불어나 상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특히 3~5년 뒤에 상환하는 조건으로 시설자금을 빌린 기업들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원금상환 압박을 받으면서 비상이 걸렸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산업단지 입주기업의 상당수가 엔화 대출을 받았다"며 "실질적으로 원금을 갚아야 하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엔화 대출 중소기업들의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만기 연장을 하는 업체들은 주로 7월 말에 재계약을 하기 때문에 두 배로 뛰어오른 금리와 높은 원 · 엔 환율로 인해 이중고를 겪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부 기업들은 원 · 엔 환율 상승으로 원화환산 부채가 증가함에 따라 추가 대출을 못 받는 부작용도 겪고 있다. 한 부품업체 관계자는 "원 · 엔 환율 상승으로 장부상 부채비율이 두 배로 높아지면서 은행에서 대출을 안해주려 한다"며 "같은 돈을 빌리고도 두 배나 더 많이 빌린 꼴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반발이 확산되면서 최근 인천 남동공단 일대에선 법무법인들이 '엔화 대출 상환과 관련한 법적 대응방안 설명회'를 빈번히 열고 있다. 한 법무법인 관계자는 "경기침체로 매출 부진이 계속되는 데다 엔화 대출 상환압박이 커지자 많은 업체가 채무재조정 등 기업회생제도를 신청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엔화 대출 피해업체 모임(엔대모 · cafe.naver.com/yendemo) 회원 63명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신한은행,하나은행,국민은행,우리은행,외환은행 등 8개 은행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은행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작년부터 엔화 대출을 받은 중소기업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대출금리를 낮춰주고 상환기간을 연장해주고 있다"며 "그러나 기업들도 저금리로 돈을 빌릴 때는 좋아하다가 이제와서 환율이 올라 못 갚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은행 외화대출 담당자도 "현재도 엔화 대출을 받은 업체의 80%가량은 연장을 받고 있다"며 "개별기업의 상황이 모두 다른데 엔화 대출을 무조건 만기 연장해 달라는 태도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심은지 기자 summi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