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40주년을 맞은 소설가 박완서씨(79 · 사진)가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현대문학)를 냈다. 술술 읽히는 것이 소설마냥 재미있다. 뜰이 있는 집으로 이사한 후 욕심껏 잔디와 사투를 벌인 '흙장난'에서부터 영화관,한강과 남대문에 대한 소소한 추억까지 노년의 일상을 따뜻하게 보듬었다.

개인과 사회의 역사란 이런 것일까. '아아,남대문'에선 서울에 첫발을 디디며 대면한 넉넉한 표정의 남대문은 전쟁의 포화 속에 서울을 버리고 떠난 피난 대열을 바라보며 비장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눈발은 성기고 가늘어서 길엔 아직 쌓이기 전인데 기왓골 등에만 살짝 쌓여서 기와의 선이 사선지의 먹물로 그은 것처럼 부드럽게 번져 보이는 게 그지없이 정답기도 했지만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볼 땐 산처럼 거대하고 준엄해 내 옹색한 시야를 압도하고도 넘쳤다. '

작가는 "6 · 25 경험이 없었다면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도 느끼고 남들도 그렇게 알아줄 정도로 나는 전쟁 경험을 줄기차게 울궈먹었다"며 가볼 수 없었던 '다른 길'을 상상하지만 그가 걸어온 길의 생명력은 길고도 질기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