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대·중소기업 상생은 생존조건
中企의 수평적 역량 전제돼야
中企의 수평적 역량 전제돼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이슈화된 것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53년 뉴저지법원의 'AP 스미스사 재판'이 그 논쟁의 계기로 흔히 인용된다. 재봉틀을 만들어 파는 이 회사가 프린스턴대에 1500달러의 기부금을 내자,주주 한 사람이 '주주들이 가져야 할 몫을 경영자가 대학에 기부해 손해를 입힌 것은 무효'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법원은 '기업은 좋은 시민성을 가질 의무를 지고 있으므로 기부행위가 직접적인 기업이익과 무관하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인정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 이전 오랫동안 미국 기업들이 추구해온 하나의 가치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주주들의 투자수익을 위해 조직되고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 사회의 시민 · 환경 · 소비자운동 등에 따른 시대 조류와 맞물려 기업의 사회적 책임,윤리적 의무에 대한 논란이 본격화됐다. 반면 이 개념 자체를 '반시장주의'로 부정하는 분위기 또한 여전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최대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기업에 그 이상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자유사회를 망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기업경영이 글로벌화되고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기업에 대한 요구 차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업이 주주와 경영자,종업원만의 것이 아니라 거래처와 소비자,지역사회,나아가 글로벌시장과의 네트워크에 의존된 유기적 구성 인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한 경영행위가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에 반하지 않아야 하고 공익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다. 1류 기업 나이키가 줄곧 저임금 노동력 착취의 대명사로 지탄받고,BP가 최근 멕시코만 기름 유출에 따른 해양오염으로 위기에 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CSR은 기업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자 당연한 의무다. 누가 강요한 책임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의 자각이자 지속 성장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나온 미래 전략인 것이다. 요즘 화두로 떠오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과 함께 가지 못하는 대기업이 홀로 생존할 수 없고 산업생태계를 파괴해 결국 공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 이후 대기업 때리기가 잇따르고,대기업들은 쫓기듯이 중소기업과의 상생방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불공정 거래,납품가 후려치기,기술 뺏기를 일삼는 '나쁜 대기업'을 가려내 법과 제도로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모든 대기업의 이익이 모든 중소기업을 착취한 결과라는 이분법적 접근으로 갈등 구조를 조장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방식이다. 대기업들은 부도덕한 존재로 내몰렸고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만 키우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최대 이익을 냈다는 이유로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삼성전자가 실은 정부도 인정해온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 우수기업'인 것은 아이러니다.
간과되고 있는 게 있다. 상생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필요로 하는 역량을 수평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년 우리 중소기업은 끊임없는 정책적 보호와 지원 · 육성의 대상이었다. 자본 기술 인력 시장의 취약성에 대한 배려였다. 그간 나왔던 중소기업 대책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많은 중소기업이 여태 독자적 핵심역량을 키우지 못하고 대기업에 목매야 하는 허약체질인 것은 무엇이 잘못된 탓일까. 세계 어느 곳에서든 더 싸고 좋은 것을 찾는 글로벌소싱 시대에 경쟁력이 없는 그저 그런 기술과 품질을 벗어나지 못하는 중소기업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상생은 또다시 헛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추창근 논설실장
그 이전 오랫동안 미국 기업들이 추구해온 하나의 가치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주주들의 투자수익을 위해 조직되고 운영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 사회의 시민 · 환경 · 소비자운동 등에 따른 시대 조류와 맞물려 기업의 사회적 책임,윤리적 의무에 대한 논란이 본격화됐다. 반면 이 개념 자체를 '반시장주의'로 부정하는 분위기 또한 여전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최대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규정하고 "기업에 그 이상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자유사회를 망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글로벌 스탠더드다. 기업경영이 글로벌화되고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기업에 대한 요구 차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업이 주주와 경영자,종업원만의 것이 아니라 거래처와 소비자,지역사회,나아가 글로벌시장과의 네트워크에 의존된 유기적 구성 인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한 경영행위가 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에 반하지 않아야 하고 공익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논리다. 1류 기업 나이키가 줄곧 저임금 노동력 착취의 대명사로 지탄받고,BP가 최근 멕시코만 기름 유출에 따른 해양오염으로 위기에 처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CSR은 기업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자 당연한 의무다. 누가 강요한 책임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의 자각이자 지속 성장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나온 미래 전략인 것이다. 요즘 화두로 떠오른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과 함께 가지 못하는 대기업이 홀로 생존할 수 없고 산업생태계를 파괴해 결국 공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거론한 이후 대기업 때리기가 잇따르고,대기업들은 쫓기듯이 중소기업과의 상생방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불공정 거래,납품가 후려치기,기술 뺏기를 일삼는 '나쁜 대기업'을 가려내 법과 제도로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모든 대기업의 이익이 모든 중소기업을 착취한 결과라는 이분법적 접근으로 갈등 구조를 조장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방식이다. 대기업들은 부도덕한 존재로 내몰렸고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만 키우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최대 이익을 냈다는 이유로 집중 공격을 받고 있는 삼성전자가 실은 정부도 인정해온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 우수기업'인 것은 아이러니다.
간과되고 있는 게 있다. 상생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필요로 하는 역량을 수평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지난 수십년 우리 중소기업은 끊임없는 정책적 보호와 지원 · 육성의 대상이었다. 자본 기술 인력 시장의 취약성에 대한 배려였다. 그간 나왔던 중소기업 대책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도 많은 중소기업이 여태 독자적 핵심역량을 키우지 못하고 대기업에 목매야 하는 허약체질인 것은 무엇이 잘못된 탓일까. 세계 어느 곳에서든 더 싸고 좋은 것을 찾는 글로벌소싱 시대에 경쟁력이 없는 그저 그런 기술과 품질을 벗어나지 못하는 중소기업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상생은 또다시 헛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추창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