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원폭 만들었던 20세기 프로메테우스…그는 과학자이길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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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ㅣ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ㅣ최형섭 옮김ㅣ사이언스북스ㅣ1117쪽ㅣ4만원
최고 과학자였던 오펜하이머, 히로시마 투하 후 심한 자괴감…이후 일생을 反核운동에 바쳐
최고 과학자였던 오펜하이머, 히로시마 투하 후 심한 자괴감…이후 일생을 反核운동에 바쳐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듯이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인간에게 원자폭탄을 안겨 주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것 때문에 신들의 노여움을 산 프로메테우스가 영원한 형벌에 괴로워했듯이 원자폭탄을 만든 오펜하이머도 공산주의자로 몰려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말년에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했지만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오펜하이머가 남긴 원자폭탄은 아직도 존재하고 그를 둘러싼 갈등은 끊이지 않는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이 책은 한 개인의 전기를 넘어 20세기 전반기를 그린 훌륭한 사회사이다. 독일에서 이민 온,성공한 사업가 줄리어스 오펜하이머와 화가였던 어머니 엘라 프리드먼 사이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피카소,렘브란트,르누아르,고흐 등의 그림이 걸린 집에서 경제적 · 문화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버드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당시 물리학의 중심지였던 영국 케임브리지 캐번디시연구소를 거쳐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럽 각지에서 양자물리학을 연구했고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를 미국 양자역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순탄했던 인생의 굴곡은 1943년,오펜하이머가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원자폭탄 개발을 총지휘하면서 시작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엔리코 페르미,한스 베테 등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원자폭탄을 개발한 결과는 참혹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22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덕분에 전쟁은 끝났지만 그 거대한 힘은 인류를 압도했다. 그 거대한 힘을 인류가 가질 수 있는가. 가져도 좋은가. 이런 질문들이 오펜하이머 개인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로스 앨러모스연구소 소장을 맡으면서 과학자에서 행정가로 변신했던 오펜하이머는 1945년 '손에 묻은 피'를 보면서 이 자리를 사임했다. 그리고 핵무기를 철폐하고 원자력 에너지의 국제적인 통제를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그 와중에 몰아친 매카시 광풍에 공산주의자,반미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1963년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오펜하이머에게 엔리코 페르미상을 주면서 복권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두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 책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얻는 수확은 만만치 않다. 우선 이 책은 현대의 거대 과학연구가 어떤 방법,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하얀 가운을 입고 실험실에 틀어박혀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의 외로운 모습은 현대의 거대과학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펜하이머가 이끌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처럼 수많은 과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각자 맡은 분야의 일을 하고,그것을 집대성해서 하나의 거대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새로운 과학연구의 풍경이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거대한 규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고 그 돈을 조달하고 사용하는 것도 과학자가 해야 할 일이 된다. 오펜하이머는 훌륭한 과학자가 행정가의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는 모델을 보여주었다.
오펜하이머가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을 사임한 후 보여준 행적은 사회적 파장이 큰 연구를 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책임과 윤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원자폭탄의 예는 말할 것도 없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생명조작 기술,에너지 기술 등은 인류 생존의 문제까지 건드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오펜하이머처럼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후회하고 자신이 만든 것을 다시 철폐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는가. 이런 후회를 미리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오랫동안 사람들은 과학이 가진,다른 지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지위에서 과학은 진리만을 반영하거나 추구하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도 특별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과학도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활동이 아니고 과학자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과학적인 내용보다는 인간 오펜하이머와 그의 정치적 행로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이 두툼한 책은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담고 있고 현대과학의 풍경을 인상적으로 묘사한 훌륭한 그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과 그것에 대한 답을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과학과 공학의 산물들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는 그것들이 보여줄 거대한 힘을 통제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 거대한 힘을 우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면 아무리 위험해도 우리는 그것을 가져야 하는가. 늘 오펜하이머는 애국심과 그것에 대한 반대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옳았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