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사람= 고두현 문화부장

"이젠 머리 좀 기르라우.지휘자가 될라믄 머리도 좀 기르고,뭘 할라믄 제대로 해야지.다른 걱정 말고 당장 떠나도록 해."

대학 졸업반이던 그가 막 교원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였다. 개척교회 목사인 아버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같이 있자"고 했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미래가 불확실한 '무일푼 유학'을 과감하게 떠나라며 등을 떠밀었다.

'함토벤'으로 불리는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함신익 예일대 교수(52).최근 취임 연주회를 갖고 새로운 음악 여정을 시작한 그는 "내 음악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말했다.

"처음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어머니(김영숙 · 83)의 음악적인 재능이 굉장했어요. 평안도 철산 출신인데,지금도 가끔 무뚝뚝한 평안도 사투리가 섞여 나오죠.참 속이 깊은 분이에요. 피아노도 제대로 없었던 시절이니까 학교나 교회 풍금을 가끔씩 치곤 했죠.남들이 한 번 치면 그걸 듣고 곧바로 따라 쳤어요. 하루는 어머니가 제 손을 잡고 동네 피아노 교습소를 찾아갔습니다. 일자무식 높은음 자리표도 모르는 어머니가 삼양동 일대를 다 돌아다니며 몇몇 선생님 소문을 듣고는 절 데리고 간 거죠.그게 시작이었어요. 제가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들 반대했지만 어머니만은 제 편을 들어줬습니다. 어머니의 남동생이 성악가였어요. 제 누나도 노래를 아주 잘했고요. 아,누나가 죽은 날이 오늘이군요. 좀 센티멘털한 날입니다. 열아홉살에 죽었죠.누나의 노래도 어머니만큼 제게 영향을 줬습니다. "

그는 잠시 회한에 잠기는 듯했으나 이내 활기를 되찾았다. 그의 표정은 밝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관록 있는 마에스트로답게 몸짓에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어머니의 예술적 자양분을 흠뻑 섭취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면서도 요즘처럼 학원 수업에 짓눌리진 않았다고 했다.

"아이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산동네에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놀았습니다. 가난했지만 사람 사는 세상을 맛봤기 때문에 그때의 체험이 지금 제 음악에 도움이 돼요. 정형화된 세상에서는 예술이 나올 수 없습니다. 피카소가 미대 나왔나요? 우리나라는 공부만 해라,음악만 해라,운동만 해라,그러면서 양분화시켜요. 서양에서는 모든 것을 골고루 잘 갖춘 사람이 잘 크잖아요. 악기를 다루다가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엔지니어가 됩니다. 그런 사람이 환자를 보거나 변호할 때 얼마나 사고와 상상력이 다를지 생각해보면,우리 풍토는 안타깝지요.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감수성이 뛰어난 목회자였습니다. 가족보다는 교회에 몰두하셨죠.남들이 월급 봉투 들고 올 때 헌책 같은 걸 주워 오곤 했습니다. 산꼭대기에 교회 짓는 걸 보고 흐뭇해하시고,저는 벽돌 나르고 그랬죠.은퇴하고 농사 지으며 사는 지금에야 비로소 대화를 많이 하게 됐습니다. 85세이고 건강합니다. 소요산 근처 텃밭으로 새벽 6시 출근해서 저녁 6시 퇴근하며 각종 과일,채소를 가꾸죠.미국 갈 때까지 26년을 한국에서 살았고,이후 26년을 미국에서 살았는데 지난 26년간의 아버지는 빼앗긴 아버지였지만 이젠 무언가를 드려야 하는 아버지가 됐어요. 비로소 제가 필요한 때가 된 거죠."

아버지 얘기가 나온 김에 미국 유학 시절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와준 '양아버지' 사연을 물어봤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제가 미국에서 라이스대학 석사 마치고 이스트먼음대 박사 과정 들어가기 전에 플로리다의 음악단체에서 일했죠.그 음악단체의 이사회 멤버였어요. 도널드 모슬링이라는 분입니다. 그 분이 제 인생을 바꿀 만큼 많이 도와주셨어요. 나중에 제가 은혜를 갚겠다고 하자 그는 '나에게 갚을 건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패스 잇 온(pass it on · 남에게 전하라).' 미국 사회가 건강하고 아직도 투명한 곳이 많은 건 이런 정신 덕분일 겁니다. "

그는 미국이나 일본의 유명 오케스트라도 모두 기부금으로 운영된다며 우리나라의 척박한 기부문화를 걱정했다. "기업들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하는데 음악 분야에는 관심을 잘 보이지 않아요. 우리도 카네기홀이나 산토리홀 같은 공연장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요. 최종현홀이나 이건희홀을 만들면 멋지지 않나요? 우리가 G20 정상회의를 유치하고 무역 규모도 세계 9위나 되니까 신흥 부자라고 평가하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 멋진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예를 들어 삼성이 홀을 짓지 못한다면 KBS홀을 보수해주고,우리가 그대신 5년 동안 삼성을 위한 콘서트를 해주는 거죠.홀에 삼성 이름을 붙여주면 윈윈 아닐까요?"

그는 국내 음악 교육도 너무 편향적이라고 지적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바이올린 등 학원에 보내면서 아이들에게 '학습'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딸아이에게도 처음엔 강요했죠.그런데 어느 정도 뒤에는 선택하게 했습니다. 딸이 어느 순간에 열정을 잃고 테니스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고,드라마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러라고 했어요. 지금은 보딩칼리지 전교 학생회장인데 여러 가지 하니깐 결과가 좋았습니다. 열아홉살이에요. 이름은 멜로디 함."

그가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일까. "지휘할 때가 가장 편합니다. 악기는 이제 잘 안 맞아요. 다른 음악 행위보다 지휘가 가장 편하고 가장 좋습니다. 이번에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맡으면서 제가 조금씩 변했어요. 그 전엔 제 생각을 고집하고 까칠한 편이었는데 많이 고쳐지고 있습니다. 연마 중이죠.그러니 이제 시작입니다. '자신 있다''잘 한다'보다 '잘 고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제가 열린 거죠.예전에는 '아임 소리'를 회피했지만 지금은 '아임 소리' '그건 내 실수'라고 말할 줄 알죠."

그런 그에게 다른 인생이 부러운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다른 거요?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요. 지휘가 어려워질 때 상상해보곤 하지요. 일반 회사라면 인력관리도 매력적이고….그러나 가장 매력적인 것은 축구예요. 몇 달 전 축구하다가 인대가 끊어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금 재활훈련을 하고 있지요. 축구 때문에 당한 부상은 처음입니다. 미국에선 예일대 대학원팀이랑 자주 공을 차죠.제가 이래봬도 '몸부림스'팀 주장입니다. '몸부림스'는 한인들의 축구 모임 이름이지요. 제일 맹렬한 포워드를 제가 맡았죠.하하.축구 선수 중에는 이영표를 좋아합니다. 차범근 선수도 좋아하고요. 박종원 선수라고 옛날 사람도 좋아했는데 그 스타일이 참 멋있었어요. 국제적으로는? 포르투갈의 호날두가 좋아요. "

kdh@hankyung.com

"유명 오케스트라들 동네 책방에서 연주회, 우리도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실내악 늘려야죠"

함신익 상임지휘자의 계획

"그동안에는 현대 음악에 소홀한 편이었습니다. 다양한 현대 음악의 맛을 풍요롭게 전하는 것이 세계적인 조류인데,올해부터 해외와 국내의 유명 작곡가 1명씩을 모셔 그 분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연주할 생각입니다. 먼저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씨가 곡을 위촉했던 세계적인 작곡가 크리스토프 테오파니디스의 작품을 9월30일과 10월1일 공연할 겁니다. 유엔 총회에서도 들려줄 거예요. 국내 작곡가도 곧 결정될 겁니다. "

함신익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의 계획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그는 "유명한 오케스트라들은 동네 책방에서도 5인조 연주회를 열곤 한다"며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연주회를 늘리겠다"고 말했다. "베를린 필 단원들도 수많은 실내악팀으로 흩어지고 모이면서 다양한 연주활동을 하죠.우리에게도 그런 '공격대'가 필요합니다. 개개인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지름길이기도 해요. 소규모 실내악 앙상블을 활성화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

물론 고품격 전통 클래식 음악에도 충실해야 한다. 그는 "잘 알려진 걸작들을 연주하는 '마스터피스 시리즈',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디스커버리 시리즈',실내악을 통해 앙상블의 참맛을 보여주는 '체임버 시리즈' 등을 통해 청중과 교감의 폭을 넓히겠다"고 했다.

"같은 삼계탕집도 어떤 이미지를 입히느냐에 따라 매출이 달라지잖아요. 청중과 시청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 체질을 먼저 바꿀 겁니다. "

그는 "번스타인 청소년 음악회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연주회도 마련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들이 곧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죠.공부하면서 록이나 팝을 듣는 학생과 클래식을 듣는 학생 중 누가 더 정신적으로 윤택할까요? 록은 세월과 함께 바뀌지만 클래식은 영원합니다. 이것이 고전의 힘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