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 붙일까 말까…
경력직 사원의 입사는 조직에 새 기운을 불어넣는 활력소다. 낙하산 가능성보다는 검증을 거친 인물을 영입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가움이 경계심을 앞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공채'와 '경력직' 간 갈등이 여전한 것도 현실이다. 팍팍한 생존경쟁 탓이다. 이직 경험자 절반 이상이 '후회한다'는 설문결과도 이와 무관치 않다.
◆후배면 '무관심',상사면 '무한충성'
기존 직원,이른바 '박힌 돌'의 가장 큰 관심은 서열 파악이다. 경력직이 후배라면 별 반응이 없는 게 일반적이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고 대리(30)는 "후배가 어쩌겠어,우리한테 맞춰야지"라고 말했다. 상사라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새로 온 상사의 '전방위 스펙'을 알아내는 게 우선.인사팀 · 업계 지인들이 총동원된다. 그의 취향을 알아내 눈에 드는 게 최우선 목표다. 고 대리는 "새 상사에게 '고 대리는 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일단 납작 엎드린다"면서도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요? 그럼 전쟁이죠 뭐"라고 말했다.
경력직에 대한 큰 의구심 중 하나가 "얼마 안돼 그만두는 거 아니야?"다. 중견기업 H사 인력팀에 경력직이 들어왔다. 팀원들은 빨리 적응하라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줬지만 '개인사정'이라며 두 달 만에 그만뒀다. 약 3개월 뒤 후임으로 다른 경력직이 들어왔다. 팀원들은 새로 들어온 사원을 위해 1박2일 워크숍을 빙자한 환영회까지 열어줬지만 역시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상대방의 과거 이직 경력이 화려할수록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2연타를 맞은 H사 인력팀은 다음부터는 신규 경력직이 오면 최소 6개월은 지켜보고 환영회를 하자고 내부 룰을 정했다.
◆신임 팀장과의 '소리없는 전쟁'
중견기업 마케팅팀에 근무하는 조 과장(38).그는 지난 4개월간 신임 팀장과 '소리없는 전쟁'을 벌였다. 팀내는 물론 회사의 공채 에이스로 승승장구하던 조 과장에게 시련이 닥친 건 지난 3월.대기업에서 일하던 신임 팀장이 스카우트돼 오면서부터다. 동갑인 신임 팀장은 미국 경영학석사(MBA) 출신에 일본어까지 능숙한 엘리트였다. 자신과 대비되는 수려한 외모에 집안까지 빵빵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까지는 봐줄 만했다. 첫날 출근부터 기존 업무방식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심사가 뒤틀렸다. 나름 팀내 '넘버 3'로 잘 나갔던 자신은 물론 기존 동료 직원까지 얕잡아보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술자리에서 은근히 팀장의 뒷담화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다음 날 출근하면 동료들은 신임 팀장에게 잘 보이려 안달이었다.
팀장이 무슨 말을 하건 무조건 못마땅했던 그가 마음 속에 담아뒀던 울분을 터뜨린 건 지난달 초.팀장이 신규 프로젝트 추진방안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조 과장은 큰 마음을 먹고 반대 의견을 냈다. 뿌듯한 마음에 들떴던 순간도 잠시.회의가 끝난 뒤 이어진 개인 면담에서 팀장은 "팀 동료들이 모두 찬성한 신규 프로젝트에 합류할 마음이 없으면 인사팀에 팀 변경을 건의하라"며 초강수로 맞대응했다. 그날 이후 조 과장은 팀내에서 스스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로 마음을 바꿨다. 사내 유망 부서인 마케팅팀에서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뱅크' 송 과장이 과묵해진 까닭은
대기업은 대개 입사 동기 네트워크가 탄탄하다. 동기들에게 도움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건 갓 입사했을 때와 한 부서에서 함께 일할 때의 얘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 부서로,타 회사로 뿔뿔이 흩어지면 동기의 근황을 파악하기조차 어려워진다. 국내 한 대기업에 근무하는 노 대리(29)는 "이직을 하고 나니 동기 네트워크가 없어 회사 내 블랙 리스트에 오른 '진상'들이나 회사의 각종 기밀 정보를 입수하지 못해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이렇다 보니 많은 직장인들은 학연과 지연을 이직 연착륙을 위한 제1조건으로 꼽는다. 최근 이직한 김경식 차장(39)은 이전 회사에서 자신의 부하로 있던 고교 후배가 이 회사에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곤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밥과 술 등 물량 공세로 친분을 쌓았다. 곧 회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열정이 가득 넘쳤던 송 과장(35)은 이직 후 무기력감에 빠진 사례다. 이전 회사에서는 '아이디어 뱅크'로 통했던 그다. 하지만 한발 앞서 있던 경쟁사로 이직한 이후론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퇴짜를 맞았다. "그거 검토해본 사안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를 견제하던 과장과 대리 한 명의 연합전선에 눌려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귀까지 벌개진다. 송 과장은 "업무 분위기 파악에만 4개월은 족히 걸렸다"고 털어놨다.
◆'멘토'를 가장한 '적'도
지난해 경력직으로 홍보대행사에 들어간 박 과장(34).직장을 처음 옮긴 그는 이직 후 첫 출근날부터 그를 잘 챙겨주는 이모 과장을 든든한 '멘토'로 생각했다. 3년 앞서 직장을 옮겨온 이 과장은 팀원과 팀장의 장단점은 물론 프레젠테이션(PT)을 잘하면 인정을 받는다는 정보까지 소상히 알려줬다. 그런 그에게 박 과장은 '기획 PT에 자신있다'는 다소 과장된 자신감을 내보였다. 이게 화근이었다. 부사장에게까지 PT를 잘한다는 말이 들어간 것이다. 회사는 그에게 까다롭기로 이름난 공공기관 정책 홍보 프로젝트 경쟁PT를 맡겼다. 일감을 따낼 확률은 7 대 1.쟁쟁한 대행사들이 모두 뛰어든 상황이어서 실무진이 포기한 지 오래된 프로젝트였다.
부담감이 극에 달했을 무렵,박 과장은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팀장과 부사장에게 '박 과장이 기획 PT를 잘한다'는 말을 흘린 사람이 바로 이 과장이었다는 것.'나를 좋게 본 것이겠지.' 생각을 다잡아봤지만 알음알음 뒷얘기를 들어본 결과는 딴판이었다. 이 과장이 박 과장에게 보인 관심은 자신이 맡고 있던 골치아픈 프로젝트를 떠넘길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박 과장은 "최선을 다해 PT를 준비했지만 최종 PT는 다시 이 과장이 하도록 지시가 내려와 한숨을 돌렸다"며 "그때부터 이 과장은 나에 대한 관심을 뚝 끊었다"고 털어놨다.
김동윤/이관우/이정호/강유현/강경민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