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이 '윤리 리스크(ethical risk)'로 비상이 걸렸다. 갑작스럽게 불거진 뇌물 제공 혐의로 벌금을 부과받거나 유능한 최고경영자(CEO)들의 낙마도 잇따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와 관련,9일자에 "미국 기업들이 회사 내부자 비리 문제로 고심하는 일이 빈번해졌다"고 보도했다. 이미지 관리에 한 해 수억~수십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는 글로벌 기업들의 또 다른 리스크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 담배회사인 유니버설과 얼라이언스 원 인터내셔널은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3000만달러(약 350억원)의 합의금에 의견을 모았다. 태국 모잠비크 그리스 중국 등에서 담배 판매 계약 수주를 위해 현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앞서 제너럴일렉트릭(GE)도 지난달 27일 이라크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SEC와 2340만달러(280억원)의 과징금에 합의했다. GE 측은 뇌물공여 혐의를 인정하진 않았지만 미국 간판기업으로서의 명성이 실추됐다는 분석이다.

충격이 더 큰 것은 주요 경영진의 개인 비리 혐의가 불거지는 상황이다. HP 사례가 대표적이다.
마크 허드 HP CEO는 지난 6일 갑작스럽게 사퇴 성명을 냈다. 성희롱과 경비지출 보고서 조작 등의 추문이 확산되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2005년 여성 CEO 칼리 피오리나에 이어 HP 최고직에 오른 허드는 2006년 PC 부문에서 델을 누르고 현재까지 PC업계 1위를 유지하는 등 HP를 키우는 데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결국 낙마했다.

유능한 CEO를 혐의 입증 전에 내보내야 하는 회사 측의 입장도 곤욕스러울 수밖에 없다. "빨리 자를 수도 없고,그렇다고 끝까지 보호해줄 수도 없는 게 기업(이사회)들의 고민"이라는 게 현지의 분석이다. 허드는 회사 자체 조사 결과 성희롱에는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사회는 그의 비용 조작 문제를 부각시켜 사표를 받아냈다. 유능한 경영자 대신 기업 이미지를 택한 것이다.

기업 스스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CEO를 축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보잉은 2005년 당시 사장인 해리 스톤사이퍼를 여직원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들어 해임했다. 회사는 "그의 이메일을 조사한 결과 성적 관계는 없었지만 회사의 윤리 규정(code of conduct)을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2007년에는 스티븐 헤이어 스타우드호텔 대표가 회사 밖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부하 여직원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시도했다는 익명의 투서가 이사회에 날아든 뒤 전격 해고됐다.

윤리 문제에 대해 미국 기업과 사회가 엄격해진 것은 2002년 대규모 회계부정 사태가 벌어진 엔론사건 이후부터다. 경영진과 회사의 도덕성이 도마에 오른 이후 정부 차원의 비리 처벌 기준이 강화된 것이다.

기업윤리 전문가인 로널드 심스 윌리엄메리대 교수는 "이전에는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문제에 대해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며 "인터넷에선 누구나 소문을 퍼나를 수 있다보니 어설프게 감췄다간 의혹만 부풀려지는 등 더 큰 파장이 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관우/강경민 기자 leebro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