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은행들이 외화차입을 줄이고 오히려 개발도상국에 외화를 대출해 주는 쪽으로 경영 방식을 바꿀 때가 됐다고 봅니다. "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은 11일 "국내 은행들은 지난 30여년간 외국에서 자금을 차입해 국내 기업에 빌려주고 마진을 얻어 왔다"며 "기업들이 직접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지금까지도 이런 영업 방식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13일로 취임 1개월을 맞는 어 회장은 이날 서울 명동 KB금융 본사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국내에서 유치한 원화예금을 외화로 바꾼 뒤 자본이 필요한 나라,다시 말해 이자율이 높은 개도국에 빌려주는 영업을 해야 한다"며 "KB금융이 선제적으로 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패러다임 전환 필요

어 회장은 기존 은행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밝혔다. 그는 "저축률은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기업을 비롯한 우량 고객들은 점점 더 돈을 빌려가지 않는 게 현재 국내 은행의 딜레마"라며 "국내 은행들도 원화예금을 달러 등 해외 통화로 바꿔 돈이 필요한 국가에 빌려주는 식으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불거졌던 외화유동성 위기의 재발을 막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란 게 어 회장의 생각이다.

그는 "기존에는 외화를 들여올 때 헤징(위험회피)을 어떻게 할지가 중요했는데 앞으로 국내 금융사들이 해외에 대출을 하기 시작한다면 원화를 달러로 바꿀 때 어떻게 헤징할지를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어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의 능력이 가장 중요한데 하루 아침에 금융기법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울 수는 없기 때문에 꾸준한 투자를 바탕으로 차근 차근 이뤄 나가겠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 주거래 은행은 외국계

어 회장은 "한국 대기업들의 진정한 주거래 은행은 국내 은행이 아니라 씨티,HSBC 같은 외국계 은행"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무역금융,현금관리,기업 리스크관리 등의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는 은행은 국내 은행 중 한 군데도 없다"며 "따라서 글로벌화한 대기업들 입장에서는 외국 은행과 거래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 회장은 "기업들이 외국 은행을 이용하지 않아도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하는 것이 KB금융이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설명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는 개도국 금융사들과 합병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며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대 은행인 스탠더드뱅크의 경우 아프리카 지역에 많은 지점이 있고 영향력도 상당한데 이런 곳과 손을 잡으면 한국 기업들이 아프리카 진출 시 필요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전했다.

◆비은행 계열사 키워야

어 회장은 인터뷰 내내 8개 비은행 계열사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어 회장은 "KB금융 자산의 90%가 국민은행이고 나머지 10%가 비은행 계열사들"이라며 "'범위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비은행 계열사들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 회장은 "기존 상업은행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는 제한돼 있으나 금융소비자들은 투신,보험,연금신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비스 받기를 원한다"며 "다양한 금융 서비스 범위를 확보하고 있어야 치열한 경쟁에서 생존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우리금융지주 민영화 등으로 증권사 등의 매물이 나오면 인수를 시도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급하게 인수 · 합병(M&A)을 해 비은행 계열사 규모를 늘릴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 회장은 "KB금융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95배 정도인데 주주가치 극대화를 위해 PBR이 0.5배 정도 되는 매물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인수가 어렵다"며 "계열사들의 자체 성장을 도모하는 데 힘쓰겠다"고 전했다. KB투자증권과 KB선물 통합에 대해서는 "당장은 어렵고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겠다"고 설명했다.

◆부실 책임지는 시스템 구축

어 회장은 "그동안 은행에서 가계나 기업에 대출해 준 뒤 부실이 발생해도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었다"며 "앞으로는 대출을 해 준 사람이 그에 대한 책임도 지도록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어 회장은 "이러한 시스템을 도입하면 자산을 늘리는 게 위축될 수 있다"며 "하지만 규모만 키우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만큼 리스크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덧붙였다.

KB금융은 2분기에 335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등에서 부실이 생기며 1조4000억원대의 충당금을 쌓았기 때문이다. 어 회장은 "하반기에도 위험 요인이 남아 있으며 충당금도 계속 보수적으로 쌓을 것"이라며 "국민은행 PF대출 잔액이 8조원 정도 되는데 외부 회계법인을 통해 연말까지 PF 사업장에 대한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KB금융의 수익성이 악화된 것에 대해 3년 전부터 소매금융(가계금융) 위주에서 도매금융(기업금융) 쪽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부실이 발생한 것을 최대 원인으로 꼽았다.

어 회장은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기업금융 확대 전략을 펴다 보니 아무래도 신용도가 떨어지는 기업에 대출이 늘어나게 됐고 리스크 관리가 제대로 안돼 부실이 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지만 "KB금융은 영업망이 확고하고 고객기반이 탄탄한 만큼 리스크 관리를 잘 한다면 수익성을 빠른 속도로 회복해 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어 회장은 인력관리와 관련,"최근 몇 년간 명예퇴직을 실시하지 않았는데 올 하반기에 실시할 예정"이라며 "수익성을 회복할 때까지 신입사원도 많이 뽑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 회장은 최근 정부가 서민금융을 강조하는 데 대해 "정부 정책에 동참하고 서민대출도 당연히 늘리겠다"고 말했다. 어 회장은 "하지만 주식회사는 주주의 이익이 최우선"이라며 "배당도 실시하지 못할 형편이기 때문에 무리해서 서민금융을 지원하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