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을 때다. 당시 미국이 뭘 도와주었으면 좋겠냐고 하자,우리는 당장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원조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지원해 달라고 했다. 홍릉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바로 그 상징이었다. 기술혁신으로 선진국처럼 잘 살아보자는 꿈이 우리나라 정부출연연구소의 시작이다. 정부는 오는 20일 출연연 선진화방안을 발표한다. 정권마다 시도됐던 과학기술계 출연연 개혁을 이명박 정부는 제대로 해낼 것인가.

이명박 정부는 대선 당시 과학기술투자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과학기술계 현장의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정권을 인수하면서 단행한 교육부와 과기부 통합,산자부와 정통부 통합 등 정부조직 개편은 '과학기술 홀대론'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정부조직을 개편할 때는 합당한 논리가 있었을 것임에도 이명박 정부는 '소통'에 실패한 느낌이다. 대통령 측근들은 이 대통령이 과학기술에 대해 철학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얘기일 뿐,현장에서는 '과학기술 정책이 사실상 부재(不在)한' 정권이란 비판이 거세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출연연 개혁은 새로운 전환점이 될지,아니면 과학기술에 정말 무지한 정권으로 낙인찍히고 말지 마지막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출연연 개혁작업의 출발은 좋았다. 이명박 정부는 민간 주도로 출연연 개혁방안을 내보라고 했다. 기획재정부 교육과학기술부 지식경제부는 합동으로 지난해 11월 민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위원회는 '정치적 목적' '부처 이기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한 근본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지난달까지 8개월간 민간위원회 위원장으로 이 작업을 이끌었던 윤종용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과학기술계는 물론 대학 산업계 시민단체 정부부처 노조 외국전문가 등 만날 사람은 다 만났다고 했다. 그는 삼성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한 것 같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민간위원회는 출연연을 포함한 국가 연구개발(R&D)체제 전반의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방송통신위원회 같은 대통령 직속 행정위원회로 개편하거나,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국가 R&D투자에 대한 종합기획과 조정권,예산권,평가권을 갖는 위원회로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교과부,지경부가 각각 관장하는 기초기술연구회,산업기술연구회를 해체하고, 출연연들 중 국가적 임무를 수행할 연구소들은 단일 법인으로 통합, 국가과학기술위원회로 이관할 것도 권고했다. 또 세계 수준의 연구소 운영을 위해 책임과 권한을 부처에서 연구소로 넘기는 대신 엄격한 평가와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위원회는 이명박 정부가 지난 50년간 경제개발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새로운 50년의 성장을 그려야 할 시대적 소명이 있다며 이 내용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끝이다. 정작 정부가 구상하는 출연연 선진화방안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과학기술계 현장에서는 또 속았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기재부 교과부 지경부 등이 부처 이익에 눈이 멀어 민간위원회 보고서를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형해화(形骸化)'시키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럴 바에는 뭣하러 민간위원회를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대로 가면 현 정부는 과학기술에 관한 한 '소통'은커녕 '먹통' 내지 '불통' 정권으로 끝날 분위기다.

안현실 논설위원·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