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말 다 퍼부은 뒤 커다랗게 휘갈겨 쓴 '사표'를 상사의 책상 위에 탁 소리나게 던진다. 수많은 봉급쟁이의 꿈이지만 막상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그만두자니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요,관둬도 재취업해야 하니 전 직장의 평가가 신경 쓰이는 탓이다.

개인사업을 한다 해도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결국 사표를 내도 하고 싶던 말은 입안에서 굴리다 그만 꿀꺽 삼킨다.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해서)'란 말이 유행한 적도 있었지만 봉급쟁이의 속을 뒤집는 일은 수없이 많다.

상사의 잔소리나 인격 모독은 물론 동료나 후배의 왕따도 있고,거래처나 고객이 부아를 돋우는 일도 허다하다. 억울하고 분해도 홧김에 대들었다가 일자리를 잃거나 더 심한 일을 당할까봐 썼던 사표 찢고 혼자 삭이고 만다. 그러니 누군가 한바탕 하고 나가면 부럽기 짝이 없다.

미국도 똑같은 모양이다. 항공사 승무원 스티븐 슬레이터가 고객에게 욕 먹고 뿔난 나머지 기내방송으로 "이 노릇도 끝"이라고 외친 다음 비상문으로 내렸다 경찰에 체포됐는데 사정을 안 누리꾼들이 답답한 심정을 대변했다며 변호사 비용 모금운동을 벌인다는 것이다.

국내에도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듯싶다. 아침마다 '오늘도 무사히'를 빌며 출근한다는 서비스업체 현장근무자들은 특히 더할지 모른다. 서비스업체의 경우'고객은 왕'이라고 해놓고 실제론 '고객은 봉'이라고 여기는 곳도 있다. 그러나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거나 잘잘못에 관계없이 큰소리치는 악성 민원제기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잘못이 없어도 시끄러워지거나 인터넷에 비방하는 것을 막으려 사과하면 잘못했으니 사과했다는 식으로 물고 늘어져 심지어 무릎을 꿇으라는 이들까지 있다는 마당이다.

억지가 가능한 건 고객은 왕이라는 지침에다 회사의 이미지를 고려,되도록 조용히 처리하려 한다는 걸 약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왕 같은 대우를 받으려면 고객 자신도 올바로 처신해야 한다.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식보다는 한계를 넘어선 고객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무작정 괴롭힐 수 없게 만드는 조치가 필요하다. 고객감동도 좋지만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챙기는 일도 중요하다. 힘들어서 그만두면 그뿐,사람은 많다는 식의 태도는 이제 버릴 때도 됐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