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미국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분석보고서를 통해 국제 원유시장이 초강세 국면인 '슈퍼스파이크(super spike)' 초기 단계에 진입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유가가 배럴당 최고 105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당시 국제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수준이라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2008년 2월 국제유가는 실제로 100달러를 돌파했다.

최근 유가가 배럴당 80달러를 다시 넘어선 것을 비롯해 원자재가격이 뛰고 있지만 예전 같은 '슈퍼스파이크'를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곡물가격 역시 하반기 들어 크게 올랐지만 급등세가 계속되진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하지만 최소한 완만한 상승추세는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글로벌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기로 진입할 경우 급등세를 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위험자산 선호가 원자재값 상승요인

국제 원자재가격의 움직임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지표는 CRB지수다. 이 지수는 원유 비철금속 곡물 등 주요 상품선물의 가격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CRB지수는 지난 6월 말에는 258.52였으나 하반기 들어 꾸준히 올라 지난달 29일 270선을 돌파했다.

전문가들은 원자재가격의 상승세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손재현 대우증권 연구위원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원자재는 주식과 마찬가지로 위험자산으로 취급받고 있다"며 "대표적 안전자산인 미국 달러화가 최근 약세로 돌아서자 원자재 가격이 전반적으로 뛰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투기적인 자금이 원자재가격 상승에 '베팅'하면서 오름세를 더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미국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서 매주 발표하는 원유선물 거래동향을 봐도 이런 추세가 확인된다. 원유에 대한 투기적인 수요로 추정되는 비상업용 원유선물 순매수규모는 지난 6월 첫째 주만 해도 2만4875계약에 불과했지만 이달 첫째 주에는 5만5678계약으로 증가했다.

지난달 22일 발표된 유럽의 7월 PMI 제조업지수가 시장예상(55.1)을 웃도는 56.5로 높아지는 등 주요국의 제조업경기가 회복조짐을 보이는 것도 원자재 가격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경기가 회복세를 보일 경우 원자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기대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원자재가격 완만한 상승세 이어갈 것"

원자재가격 상승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박형중 우리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경기 회복세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지난 2년보다는 양호한 상승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며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증가 요인을 감안하면 국제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은 꾸준한 상승흐름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에너지부 산하 에너지정보청(EIA)은 2분기에 배럴당 평균 77달러였던 국제유가가 꾸준한 오름세를 보이며 내년 2분기에는 82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채현기 대신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국제유가는 3분기에 상승압력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며 "미국의 드라이빙시즌에 따른 휘발유 수요증가,9월 허리케인시즌에 따른 공급차질 우려,이란 핵관련 지정학적 리스크 등이 유가상승을 부채질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원자재가격이 금융위기 이전처럼 급등하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손 연구위원은 "글로벌경기가 회복세를 보인다 해도 금융위기 이전 몇 년과 같은 호황을 구가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며 "원유 수요가 가격급등을 초래할 만큼 폭발적이진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그플레이션 현실화될까

최근 주요 상품 중 두드러진 상승세를 보이는 것은 곡물이다. 하반기 들어 밀선물 가격은 49.49% 급등했고 옥수수선물 가격도 11.08% 올랐다. 곡물가격은 올 들어 원유 비철금속 등 다른 원자재가격이 오름세를 보이는 동안에도 크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러시아정부가 이상기후에 따른 작황부진으로 연말까지 곡물수출을 중단하겠다고 밝히면서 급등세를 탔다. 중국의 곡물수입량이 지난 6월부터 늘고 있는 것도 가격상승에 일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2008년 발생했던 애그플레이션(농산물가격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향후 곡물가격 급등을 초래할 만한 요인은 그리 많지 않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수요부진과 작황호조 등의 영향으로 주요 곡물재고가 충분하다는 평가다.

최근 가격상승이 가팔랐던 소맥 역시 지난해 작황호조로 생산량이 최대치를 기록했고,올해도 러시아를 제외한 미국 인도 중국 등의 생산량이 탄탄한 증가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총리가 지난 11일 곡물수출 금지조치를 내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힌 점은 부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