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시인들의 뇌리에 박힌 인생 최고의 시적인 장면은 어떤 걸까.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가을호가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18명의 '내 인생 최고의 시적인 장면'을 관련 시와 함께 특집으로 엮었다.

'사물의 이치를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표현하는'(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 시야말로 삶속의 '결정적 순간'을 담아내는 최적의 그릇이란 의미일까. 시인들이 당시를 회상하며 풀어낸 산문도 아릿하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의 김규동 시인에게는 어린 시절 얼음을 지치고 모닥불을 피우며 놀던 곳,광복의 기쁨을 나누던 두만강의 얼음 소리가 생애 최고의 시적인 순간으로 각인됐다. '때로 가슴을 가르는/ 섬뜩한 파괴음은/ 긴장을 못 이긴 강심 갈라지는 소리.'('두만강' 부분)

김종해 시인은 1970년대 중반 퇴근길에 목격한 한 사내의 교통사고 얘기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돌아오지 않을 그 사나이를/ 밤새도록 기다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꾸는 꿈/ 우리의 마지막 상계동행 만원 버스는/ 죽은 그 사나이 때문에/ 자꾸 뒤로 굴러가고/ 우리 옆을 스치는,벌떡벌떡 숨쉬는/ 그 죽음의 덫을/ 여러분,보신 적이 있나요. '('이야기' 부분)

박주택 시인은 한 여배우가 아프리카 어린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TV로 보며 삶의 고통과 망각에 대해 숙고한다.

'아이를 안은 여배우는 가벼운 자기 삶에/ 울음을 바르고 나는 저녁밥에 배가 부른 채/ 비스듬히 화면을 본다. '('금방 잊히는 것들' 부분)

누군가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을 딛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조국을 2002년 월드컵의 승리(김광규 '오뉴월')에 빗대었다.

빨래를 너는 여자의 모습(강은교 '빨래 너는 여자'),노시인의 집을 방문했던 소회(조정권 '수유리 시편'),중국집 배달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치는 순간(이원 '영웅'),키우던 강아지를 개고기로 만든 방조의 죄책감(권혁웅 '돈 워리 비 해피') 등이 모두 시의 옷을 입었다.

부모의 죽음만큼 뼈와 살에 각인되는 슬픔도 드문 탓일까. 문정희 · 이재무 · 김영승씨 등 3명이 어머니의 죽음을 소재로 삼았다.

이재무 시인의 처녀 작 '엄니'에는 평생 힘에 부치는 농사일에 욕심을 부리다 간경화로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에 대한 한탄이 마치 영정사진 앞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거칠게 살아있다.

'마흔여덟 옭매듭을 끊어버리고/ 다 떨어진 짚신 끌며/ 첩첩산중 증각골을 떠나시는규/ 살아생전 친구 삼던 예수를 따라/ 돌아오리란 말 한 마디 없이/ 물 따라 바람 따라 떠나시는규 엄니…(중략) 다섯 마지기 자갈논 가쟁이 모래밭 다 거둬들이던/ 그 뜨겁던 맨발 맨손 왜 자꾸 식어가는규.'('엄니' 부분)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