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8 · 15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해의 광복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과거를 정리하고 한 · 일 관계의 새로운 100년을 개척해야 한다는 미래 지향적 논의가 많았다. 그 출발점은 역시 경제 협력이다. 이미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양국 경제관계를 더욱 성숙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중국의 급부상,글로벌 경제의 일체화라는 환경 변화에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는 일한경제협회의 이지마 히데타네(飯島英胤 · 75) 명예회장(도레이 특별고문)은 "한국과 일본은 누가 뭐래도 경쟁과 협조 관계"라며 "앞으로 더욱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만이 한국과 일본 경제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지마 명예회장을 도쿄 니혼바시에 있는 도레이 본사에서 만났다.

▼최근의 한 · 일 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보통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23년 전부터 한국 기업과 비즈니스를 해왔습니다. 삼성과 도레이가 제휴를 시작한 때였지요. 1995년 삼성전자 · 삼성전기와 합작회사를 만들어 함께 글로벌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요. 한 · 일 관계는 정치적으로 불행한 적도 있었지만,경제계는 지속적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예컨대 매년 10월 열리는 일한경제인협회 모임은 한번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돼 있습니다. "

▼두 나라가 좀 더 미래 지향적인 협력관계를 맺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 · 일 관계는 이제부터 경쟁과 협조 관계가 돼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경제기반이 약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자원이 빈약하고,둘째 수출 의존도가 높습니다. 셋째 수출을 뒷받침하는 기술을 위해 훌륭한 인재가 절실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나라 모두 인구 감소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게 비슷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세계 시장은 이미 단일화됐습니다. 때문에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과 일본은 경쟁이 불가피하지요. 동시에 두 나라가 완전히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협력할 부분도 많습니다. 지금도 한국 수출품의 60%가 일본 부품을 사용합니다. 한국은 생산기술이 뛰어나고,일본은 부품 · 소재가 강하지요. 이걸 합치면 큰 시너지 효과가 나올 것입니다. "

▼한국은 일본에 대한 부품 · 소재 의존도가 높아 대일 무역적자가 연간 300억달러에 달합니다.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한국의 대일적자 규모가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도 이 문제를 냉정히 따져봐야 합니다. 한국이 무역적자를 내는 나라는 산유국을 빼면 일본과 독일뿐입니다. 부품 · 소재 때문이죠.나는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모든 교역국과 균형을 잡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부품 · 소재는 경영 자원으로 봐야 합니다. 그걸 활용해서 한국이 수출을 더 늘릴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닌가요. 그렇다고 대일적자를 방치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적자폭을 줄이려면 일본에 대한 수출을 늘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의 대일 수출은 연간 200억달러 수준에서 정체한 지 오래됐습니다. 한국 기업이 대일 수출을 늘리려는 노력을 더 해야 합니다. "

▼최근 한국 경제를 보는 일본의 시선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한국 경제는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급속히 회복됐습니다.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경제정책이 기업들의 글로벌화를 뒷받침했다는 것을 꼽고 싶습니다. 원화가치 안정 정책이 대표적이지요. 이게 수출을 늘렸고,고용과 투자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둘째 한국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전략적으로 추진한 게 주효했습니다. 셋째 실효세율이 25%로 경쟁국에 비해 낮은 법인세도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일본은 법인세율이 40%에 달하거든요. 넷째 물류 환경을 잘 정비했습니다. 인천공항과 부산항은 하늘과 바다의 허브로 한국 경제의 큰 메리트입니다. "

▼일본에서 요즘 한국 기업을 배우자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의 약진에 일본 기업들도 놀라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세 가지 요인 때문이라고 봅니다. 첫째 의사결정이 매우 빠르고,책임 소재가 분명합니다. 둘째 오너 경영인들의 경쟁력입니다. 그들은 국제 경험이 풍부하고,경영 감각이 탁월합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대표적이지 않습니까. 셋째 인재 경쟁력이 뛰어납니다. 한국 기업의 사원들은 미션에 대한 사명감이 높고,돌파력도 강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한 · 일 간에 공통 고용시장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

▼작년 말 한국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수주한 데 대해 일본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요.

"UAE 원전 수주는 전적으로 '경제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의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나보기도 했는데,그는 '경제인들과 얘기할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하더군요. 대통령이 그 정도로 경제에 관심이 높으니 해외 원전 수주에도 적극 나선 것이지요.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사장을 거친 경영자 출신 아닙니까. 협상 막판에 이 대통령이 UAE 왕세자에게 직접 전화해서 '60년 보장'이란 파격적 제안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쟁자였던 일본의 민간 기업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한국 정부의 그 같은 노력이 상대방에게 신뢰를 심어줘 수주에 성공했다고 봅니다. "

▼한 · 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2004년 이후 중단 상태입니다. 무엇이 문제라고 보십니까.

"한 · 일 FTA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역 불균형으로 인한 한국 국민들의 정서적 거부감이 걸림돌이지요. 게다가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가 일본 승용차와 TV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일본의 비관세 장벽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중소기업과 농업 등 취약 부문의 반발도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양국 경제계에는 이미 FTA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두 나라 경제계는 2년 전부터 자국 정부에 협상 재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 정부는 적극적이지만,한국이 좀 소극적이지요. 이명박 대통령의 결단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

▼한 · 일 FTA는 꼭 체결해야 합니까.

"물론입니다. FTA는 단순히 관세만을 인하하는 게 아닙니다. 비관세 장벽 철폐도 포함돼 있습니다. 또 양국 간 교역 확대를 위한 품질 표준,인증 제도,인적 교류 등 포괄적인 협력 방안이 들어갑니다. 한 · 일 FTA가 체결되면 한국은 일본의 첨단 기술을 활용해 수출을 더 확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한국도 이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한 · 일 관계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들이 일본 시장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일본의 상(商)관행에도 문제가 있지요. 일본은 계열화가 철저하고,유통구조도 다른 나라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한국 기업의 대일 시장 전략과 개척 노력에도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컨대 자동차의 경우 일본은 5~6개 자동차 회사가 있습니다. 비슷한 경쟁 차종을 갖고 진출하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일본 자동차가 미국 시장 진출에 성공한 것은 소형차 중심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지요. 한국 기업 중에는 일본 시장에 진출해 성공한 기업도 있습니다. 시장 특성을 철저히 연구하고,부단히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

▼중국 경제가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한국과 일본은 20세기에 동쪽(미국)을 보고 달렸습니다. 21세기엔 서쪽(중국)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국은 거대 소비시장과 생산기지로서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이걸 제각각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일단 한국과 일본이 더욱 제휴를 강화한 뒤 중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 · 중 · 일 FTA 논의도 있지만,한 · 일 FTA가 먼저 맺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페이스에 말릴 수 있습니다. 그땐 한국이 일본보다 더욱 큰 피해를 봅니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기 십상이지요. 일본은 그나마 기술 경쟁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중국에 대항할 만한 큰 무기가 없지 않습니까. "

▼궁극적으로 한 · 중 · 일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은 어떤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한 · 중 · 일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호주 뉴질랜드를 포괄하는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구성해야 합니다. 그 전제는 긴밀한 한 · 일 관계입니다. 요즘 양국 간 경제협력이 참 원만합니다. 한 · 일 정상회담이 열릴 때 민간 기업인들도 한 · 일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형식으로 회의를 갖습니다. 회의 결과는 양국 정상에게도 보고하지요. 벌써 4회째 회의를 열었습니다. 일본으로서도 이렇게 성숙한 관계를 갖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업인이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을 가장 높게 평가합니다. 이 회장은 사업을 글로벌,아니 우주 규모로 생각하더군요. 이런 제품은 어디에서 만들어서,어디에 파는 게 가장 좋을까를 세계를 상대로 연구합니다. 글로벌 경영에 필요한 인재 육성에도 열성적입니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 포함해 '삼성맨'을 키우는 경영자입니다. 글로벌 경영자로서 그릇이 크다고 할까요. 세계적으로 그런 경영자는 많지 않습니다. "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

이지마 히데타네 명예회장은

2006년부터 지난 6월까지 4년간 협회 회장을 지냈다. 특히 도레이 임원이던 1980년대 말부터 삼성전자 등과 합작사업을 벌여 한국 기업을 누구보다 속속들이 잘 안다. 일본 기업인 중 한국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꼽힌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입사한 세계적 섬유기업 도레이에서 잔뼈가 굵어 "이젠 도레이의 고목나무가 됐다"고 스스로 말한다. 도레이에서는 인사와 경영기획을 주로 담당했다. 대외 활동도 활발해 일본의 대표적 경영자 모임인 경제동우회 간사,재계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 · 경제단체연합) 이사 등을 역임했다.

◆약력

△1935년생 와세다대 교육학부 졸업 △1959년 도레이 입사 △인사부장(1986년) 경영기획실장(1990년) 부사장(1999년) 도레이경영연구소 사장(2001년) △도레이 특별고문(2003년~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