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에 있는 창전사 1층 회장실.이곳에는 낡은 캐비닛 10개가 놓여 있다. 캐비닛 내부는 창업주 정문규 회장(87)이 48년간 수집한 때묻은 자료들로 가득하다. 세월의 더께가 쌓이고,낡아 너덜너덜해졌지만 정 회장이 사업을 하면서 기술개발을 위해 해외에서 힘겹게 구입한 서적 등이다. 그는 요즘도 일본에서 발간되는 권당 5만~160만원 하는 전문 서적을 매년 2000만원어치 이상 구입해 읽는다. 선진 기술을 현장에 접목하기 위해서다.

정 회장은 "부천 공장에서 시화 공장으로 이전할 때 버린 자료만 4t트럭 한대 분량이었다"며 "일본의 관련 서적을 스승삼아 기계를 직접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구순을 바라보는 정 회장은 지금도 매일 회사에 출근해 직원들을 독려한다. 이런 정 회장의 열정이 창전사를 에나멜동선 분야에서 독일의 일렉트릭솔라,일본의 일본제선 등 세계적인 기업과 경쟁하는 강소기업으로 키운 원동력이다.

1 · 4후퇴 때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에서 혈혈단신 월남한 정 회장이 1956년 대전에 터를 잡고 시작한 첫 사업은 편직물 제조.하지만 편직물은 겨울 한철 장사로 돈벌이가 안됐다. 1962년 무작정 상경한 그는 세운상가에 창전사란 간판을 내걸고 당시 인기 있던 형광등(안정기 포함)을 팔았다.

정 회장은 "장사를 하다 보니 형광등을 파는 것보다는 안정기에 사용되는 에나멜동선을 만드는 게 돈벌이가 된다는 생각에 사업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당시 에나멜동선은 동선에 절연피복을 입힌 뒤 도장기에 넣고 장작불을 때 경화시켰는데 일정한 온도를 맞출 수 없어 품질이 들쭉날쭉했다. 그래서 일정한 온도로 경화할 수 있는 전기방식 도장기를 개발했다. 정 회장은 "2년 남짓 연구 · 개발에 매달려 처음엔 한줄짜리 도장기를 개발했고 점차 넉줄,여덟줄로 성능을 높여갔다"며 "당시 제대로 된 부품이 없어 포탄피를 주워다 만들었을 정도로 열악했다"고 말했다.

도장기를 개발한 정 회장은 1963년 서울 면목동에 소규모 공장을 마련,라디오 · 전축에 사용되는 트랜스용 에나멜동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0년 전후로는 판매붐이 일었던 선풍기의 모터용 에나멜동선을 공급하면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오일파동으로 선풍기 업체들이 감산하면서 매출이 급감한 데다 전화기용 에나멜동선에서 불량품이 나온 1979년엔 대규모 손실이 발생,회사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정 회장은 "사채를 얻어 직원 월급을 주면서 버텼다"며 "초인종용 · 분전반용 등 품목을 다양화하면서 위기를 이겨냈다"고 말했다.

소량생산 방식으로 한계를 느꼈던 정 회장은 1980년 들어 양산설비 개발에 나섰다. 일본에서 최신 설비 2대를 들여와 직접 뜯고 조립하는 과정을 거쳐 3년여 만에 양산설비를 개발했다. 이는 창전사에 날개를 달아줬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전자레인지 및 TV 시장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때 양산설비를 이용해 국산화한 전자레인지에 들어가는 고압트랜스용과 TV에 사용되는 DY(편향코일)용 에나멜동선을 대량 공급하게 됐다.

정 회장은 "당시 넘쳐나는 물량을 제때 댈 수가 없어 1995년 30억여원을 들여 시화 공단에 공장을 신축하고 설비를 증설했다"며 "특히 컬러TV 판매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외환위기 때도 삼성전자 LG전자 등에 편향코일이 없어서 못댈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2003년 가업을 승계한 정인호 대표(53)가 입사한 시기는 대학(단국대 기계공학과)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한 1984년.정 대표는 "아버지가 일군 가업을 지키고 싶어 대기업 입사를 포기했다"며 "공장청소 기계수리 포장 영업 회계 등 분야별로 2~3년씩 맡아가며 교육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기계는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만져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명(?)을 실천해온 정 대표의 손바닥은 굳은살로 덮여 있다. 그는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회사에 나와 24시간 돌아가는 현장을 챙기는 게 너무 힘들어 회사를 뛰쳐나간 적도 여러 번"이라며 "지금은 이골이 나 하루라도 회사에 나오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고 털어놨다.

정 대표는 최고경영자(CEO)가 된 뒤 자동차에서 전원을 연결했다 끊었다 하는 릴레이용과 LCD · LED TV에 들어가는 인버터트랜스용 등 고부가가치 에나멜동선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세계 최고 기술 수준인 0.03~0.04㎜의 극세사 에나멜동선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했다. 극세사 에나멜동선은 2006년부터 일본과 독일에서 전량 수입하던 것을 대체시켜 국내 시장의 60~70%를 점유하고 있다.

정 대표는 "우리 회사는 생산되는 제품의 불량률이 '0'일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한 명의 직원이 기계 4대를 다룰 정도로 숙련도가 높은 게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100년 가업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며 "올해 자동차와 TV 분야의 판매 증대로 지난해보다 50% 이상 늘어난 3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덧붙였다.

이계주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