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을 넘긴 소년의 뺨이 서쪽 노을에 비쳐 말갛다. 세월은 어느덧 소년을 해질 녘 방향으로 서게 만들었던가. 시인 장석남씨(45 · 사진)가 5년 만에 여섯 번째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펴냄)를 내놓았다. 여전히 바람과 별,바위와 싸리꽃 내음을 풍기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서정성을 보여주지만 이번엔 생활인의 비애가 자성과 죄책감으로 묻어있다.

'나는 은둔자/ 산 속에 가만히 가부좌를 하고/ 별을 헤듯 돈을 센다/ 지적도를 보고 땅값을 계산하고/ 구약을 조금씩 읽으면서도/ 돈을 센다/ 돈은 나를 센다/ 나는 은둔자…(중략) 나는 나의 죄를 사랑해야지/ 나는 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으니 사랑해야지/ 이런 사랑의 힘을 또 사랑해야지/ 사랑의 포대기는 크기도 하지/ 사랑의 골짜기는 첩첩도 하지/ 욕 뒤에 숨어 또 욕을 한다/ 몰소리를 붙잡고 욕을 한다/ 나는 은둔자.'('은둔자' 부분)

어느 절에서 맞은 저녁,종소리를 듣고 나와보니 '처마 끝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거룩해보인다. 배설물이 튄 변기를 닦으며 소변과 경솔,가난과 돈을 흘리지 않겠다며 바람 속을 걷는('변기를 닦다') 모습은 정갈하고 순수한 자아를 추구하는 시인의 내면을 보여준다. 극작가 최창근씨는 시집의 발문에서 이를 "스스로 마련한 도덕적인 거울을 통해 자신이 타락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한 사내의 곱고 조용한 내면에 깃든 죄의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래도 사랑과 인생,삶의 원천을 고민하게 하는 '장석남 표'시어들은 맛깔스럽고 생생하고 절묘하다.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묵집' 전문)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