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리가 한껏 꾸미고 출근했다. 김 부장이 물었다. "웬일이야 오늘,어디 가나?" 이 대리가 답했다. "친구 만나러 '고터'가요" "고터가 뭐야,고기 굽는 터야?" "고속버스터미널요. 강남터미널은 강고터,동서울터미널은 동고터로 부르는데…." "????" "어쩔…."

몇 차례 문답이 오간 뒤 이 대리가 말을 끊었다. 김 부장으로선 "근데 자네는 왜 말을 하다 마나?"라고 물을 수밖에."네?에구 죄송! 말 다 한건데…"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어쩔'은 '아~ 어쩔거야'를 줄인 혼잣말이다.

직장 내 의사소통이 힘들다. 젊은 직원들끼리 하는 대화를 늙수그레한 간부들이 알아듣기 어렵다. 젊은 직원들 사이엔 무슨 말이든 줄여쓰는 축약어가 유행이다. 트위터 같은 단문 메시지가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대화에 끼려면 포털 사이트를 뒤지거나 '개그콘서트'라도 챙겨봐야 한다. 'RT(전달하기)''멘션(쪽지 보내기)' 등 트위터 용어는 따로 챙겨둬야 한다. 반면 신입사원들은 업무 편의를 위해 사용되는 각종 약어들 때문에 혼란스럽다.


◆나도 한땐 신조어 제조기였는데…

1990년대 대학을 다닌 기업체 과장급은 'X세대'로 불렸다. 당시 '신세대'라는 담론이 유행하면서 신인류로 떠오른 게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직장 내에서는 구세대로 몰리기 일쑤다.

국내 한 중견기업에 근무하는 J과장(37)은 행정안전부가 공무원 시험 제도를 바꾸기로 해 신림동 '공시족'들에 비상이 걸렸다는 기사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J과장은 "신림동 고시촌에 비상이 걸렸다는 내용을 신림동 공시족으로 잘못 표기했다"며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하느냐"고 말했다. 후배 직원들은 박장대소했다. "공시족은 '공무원 시험 준비족'을 가리키는 흔히 쓰는 말인데 그것도 모르냐"는 면박을 들어야 했다.

얼마 전 대기업에서 일하는 P과장(35)은 Y주임(28)과 밥을 먹으며 원빈이 나온 영화 '아저씨'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식사 후 Y주임은 원빈 사진을 P과장에게 보내며 "빈느님 사진,안구 정화 하세요"라고 썼다. P과장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Y주임은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전지전능한 구은재를 보고 네티즌들이 '하느님'과 등장인물을 섞어 '구느님'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빈느님'은 원빈을 칭한다는 것.그는 "'안구 정화'는 잘생긴 원빈 사진을 보고 눈을 맑게 하라는 뜻"이라고 자세히 설명해줘야 했다.

◆'안습'은 참아주세요~

나름 신조어 전문가를 자처하는 고참 상사도 많다. 신조어에 관한한 얼리어답터들이다. 문제는 시도때도 없이 신조어를 오 · 남용한다는 점이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C씨(28)는 입사 직후 회사 기획이사와 팀 단위 회식에 참석했다. 썰렁한 분위기를 참지 못했는지 이사는 C씨에게 "요즘 젊은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는 말은 뭐냐"고 물었다. 평소 웹서핑을 즐겨온 C씨는 "이사님 '안습'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안구에 습기찬다'를 줄인 말로 난감하고 황당한 상황을 정리할 때 쓰는 말입니다"라고 알려줬다.

얼마 후 기획이사가 주최한 회의 시간.쉬는 시간에 이사는 "지난 주말에 친한 친구가 부친상을 당해서 청주에 다녀왔어.친구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거참… (잠시 뜸을 들인 후) 안습이더군"이라고 말했다.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몇몇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여잡기 위해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C씨는 "한동안 '안습이더군'이라고 말씀하시던 이사님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내는 게 유행했다"고 말했다.

◆용어 사전 어디 없나요?

신조어에 능한 신세대 직장인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업무용 약어 탓이다. 입사 2개월차인 햇병아리 신입사원 K씨(28)는 1,2년차 선배들이 구내식당 구석에서 나누는 암호수준의 대화를 '해석'하느라 진땀을 뺐다. 대화는 이랬다.

"어제 '오플' 안돼서 난감했어."(2년차) "'아메'도 안돼요?"(1년차) "응.'장표' 만들어야 하는데 둘 다 안되더라."(2년차) "그나저나 선배 '복포' 쓰셨어요?"(1년차) "아니 아직,한참 남았지."(2년차)

외계어 같은 대화를 멀뚱히 듣기만 하던 K씨는 식사가 끝난 뒤 1년차 선배에게 슬쩍 물어봤다. 알고보니 오플은 회사 인트라넷 '오피스 플러스',아메는 사내 메신저 '아이 메신저',장표는 '파워포인트',복포는 '사원 복지 포인트'의 줄임말이었다.

유통회사에 다니다가 IT업체로 이직한 L대리(33)는 입사 후 엄청난 영어 약어들에 놀랐다. 'SI(시스템 통합)''SM(시스템 관리)''ITO(IT 아웃소싱)''CMMI(성숙도 분야의 국제 인증 모델)' 등 업계 용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L대리는 "이전 회사에서 APSD(일평균 매출) ASPM(월평균 매출) 등 용어에 익숙해지는 데도 한참 걸렸었는데 이직 후 2~3주간은 신입사원 입문교육에서 쓰는 IT용어집을 매일 공부했다"고 토로했다.

업무용어를 입에 달고 살다 보니 해프닝을 겪기도 한다. N과장(35)은 아내와 가족 계획에 대해 대화를 하던 중 'AS-IS(현재 상황 · 아이가 하나일 때)'와 'TO-BE(이상적 상황 · 아이가 둘일 때)'를 분석해보자고 제의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식당에 가서는 기본 반찬을 보며 무심결에 "이건 디폴트(소프트웨어 등 환경 설정에서의 기본값)인가요?"라고 종업원에게 진지하게 물었다가 면박을 당해야 했다.


◆상사 애칭은 자주 바꿔야 안전하죠
약어나 은어 등 이중언어가 요긴할 때도 있다. 말단 사원들이 뒷담화를 즐길 때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나 선후배들을 자기들만 아는 별칭으로 부르는 건 부하들의 생존기술이다.

G대리(32) 상사의 호칭은 '효연'이다. G대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 이름이다. 상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에 걸릴 확률은 '제로'다. 어느 날 동기와 커피를 마시면서 "효연이가 너무 입이 싸서 짜증난다"며 상사 뒷담화에 열을 올릴 찰나,그 상사가 갑자기 나타나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본인 얘기인 줄도 모르고 "쯧쯧 그렇게 입이 가벼우면 안되지"라며 웃으며 지나갔다. G대리는 "바람 피우는 남자들이 휴대폰에 애인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바꿔서 넣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설명했다.

M대리(33)는 팀장을 '미돼(미친 돼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회식자리에서 일격을 당했다. 거나하게 취한 팀장이 "너희들이 날 '미돼'라고 부르는 거 다 알아. 뭐라 부르던 상관하지 않겠지만 들키진 마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M대리는 다음 날 팀장의 별칭을 자신이 기르는 강아지 이름인 '뽀삐'로 바꿨다.

강유현/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yhkang@hankyung.com

▶이 기사는 독자 elif95 님의 아이디어 제공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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