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시 개편, 기득권자 잔치 안돼야
박완서씨의 소설 '오만과 몽상'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친일파가 매국노를 낳고 매국노가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가 악덕기업인을 낳고,동학군이 독립군을 낳고 독립군이 수위를 낳고 수위가 도배쟁이를 낳고.'실제 광복과 6 · 25전쟁,5 · 16혁명 등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도 계층 세습은 적잖이 계속돼온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기회가 없진 않았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도 고생 끝에 사업가로 성공하고,대학 간판 없이도 사법고시를 거쳐 판검사 · 변호사도 되고 국회의원도 됐다. 본고사를 치르던 예전엔 중 · 고교 때 놀았어도 다시 머리끈 매고 공부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다. 고교 서열화를 막고 사교육을 줄인다며 시행된 고교 평준화는 특목고와 외국어고를 만들어내 아이들을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과 과외로 내몰았다. 일류대 몫의 상당 부분을 몇몇 학교에 내준 만큼 일반고 학생들은 남은 자리를 놓고 다투는 형국이 됐다.
내신 위주의 수시 입학제도,논술과 입학사정관제 또한 신규 고액 과외시장만 창출,없는 집 아이들을 더욱 궁지에 빠트렸다. 아이들을 시험에서 구하겠다며 고안해낸 복잡한 전형제도는 대학입시가 당사자의 노력보다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에 좌우되게 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기회를 줄이고 빼앗았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지만 시험은 노력의 결과를 가장 공정하게 반영한다. 죽자고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고 성적이 좋으면 합격할 수 있는 만큼 정실이나 압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행정고시에 매달리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고시는 학력 · 학벌 · 성별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패자부활을 가능하게 한 거의 유일한 통로나 다름없었다. 이런 행정고시 제도를 바꿔 2015년까지 50%를 외부전문가로 충당한다고 한다. 절반만 공채하고 나머지는 서류와 면접으로 채용하겠다는 것이다.
명분은 충분하다. 개방과 경쟁 중심의 공직 선발시스템을 마련하겠다,세상이 급변하는 만큼 적절한 스펙을 갖춘 전문가를 뽑겠다는 게 그것이다. 고시 출신들의 이너그룹 형성을 막겠다는 취지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무에 곧장 투입할 수 있을 만큼의 전문가적 소양을 쌓는 일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형편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대학공부를 해야 하는 서민 자녀들에겐 불가능에 가깝다. 영어만 해도 부모 덕에 외국에서 태어나 자랐거나 유학을 갔다온 사람이 아니면 능숙하기 쉽지 않다.
투명성과 공정성 개방성 확보가 관건이라지만 서류와 면접만으로 채용하면서 그게 말처럼 간단할 거라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적다. '현대판 음서제(蔭敍制,고려 · 조선 시대에 중신 및 양반 일가를 특채하던 제도) 부활이나 다름없다''계층 재생산의 완결판이다''가타카가 따로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우연의 일치인지 최근 화려한 스펙의 유명인사 자녀들이 여기저기서 "기회만 되면 나랏일을 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공무원이 좋아 뵈면 시험 봐서 합격 하는 게 도리다. 분야별로 특성화된 전문가를 뽑으려는 의도라면 응모의 폭을 최대한 넓혀 그들끼리라도 시험을 치르도록 해야 마땅하다.
공정한 사회,정의로운 세상은 학업과 취업 등 모든 부문에서 공정한 기회를 제공, 누구든 태생과 처지에 매몰돼 희망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교육제도 수정이 그랬듯 행정고시 개편 역시 서민과는 아득하게 동떨어진 기득권자들의 잔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