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다시 보기] (15·끝) 英,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과연 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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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끝) 이민의 경제학
스페인 박해 피해 16세기 영국으로 1만5천명 이민
탈세·국부유출 이유로 '소매상 금지법'까지 만들었지만…
스페인 박해 피해 16세기 영국으로 1만5천명 이민
탈세·국부유출 이유로 '소매상 금지법'까지 만들었지만…
16세기 네덜란드는 원래 스페인령이었다. 16세기 후반 스페인이 친 가톨릭 정책을 강화하자 네덜란드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종교적 박해,전쟁,경제적 파탄을 피해 네덜란드에서 다른 유럽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숫자는 거의 20만명에 이른다. 이 중 영국으로 이민한 사람도 1만5000여명이나 됐다.
당시 영국인들은 이민자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였을까? 예나 지금이나 원거주민인 주류 집단이 이민자 집단을 바라보는 시각은 복합적이다. 그중에서도 이민자에 대한 호(好),불호(不好)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지,아니면 오히려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지에 대한 판단이었다.
1593년 영국 의회에 하나의 법안이 발의됐다. 런던시(市) 정부가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이 법안은 모든 외국인 이민자의 소매업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말이 '모든 외국인'이지 사실은 네덜란드 이민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법안을 심사할 위원회가 구성되었지만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 바람에 원활한 의사진행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결국은 양 쪽의 입장을 들어보는 청문회를 갖기로 했다.
법안에 찬성하는 쪽은 이민자들이 영국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강조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민자들은 본국의 친지를 통해 물건을 들여오는데 이들이 파는 상품의 질이 워낙 좋고 거기에다 가격까지 저렴했다. 그래서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런던 소매상들의 경제적 고통이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제기한 또 하나의 논점은 이민자들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림으로써 국부 유출과 탈세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법안에 반대하는 쪽의 의견은 달랐다. 이민자들은 종교적 이유로 영국에 건너온 '양심의 피난자'들인데 이들에게서 유일한 생계 수단을 박탈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처사라는 것이었다. 반대론자들은 또 이들의 경제활동이 시장의 물품 가격을 낮춤으로써 구매자 숫자를 증가시키는 긍정적인 경제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민자들은 영국인보다 2배의 세금을 내므로 이들에 의한 국부 유출은 근거가 없다고 강변했다.
이민자들에 대한 동정론과 이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이 득세하자 법안 찬성론자들은 더욱 공격의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낯선 자들을 우리 중 한 사람으로 여기고 사랑하며 베풀라'는 구약성경 레위기의 구절에 대해 '우리가 먼저 곡식을 수확한 후 이삭을 남겨주면 되지 왜 그들에게 땅을 넘겨주고 우리가 이삭을 주워야 하느냐'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본성상 자신들의 이익만 좇을 뿐 누구에게도 오래 복종하지 않는 족속'이라는 원색적 비난도 나왔다. 이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배려 정책이 집안에 '유독한 전갈'을 기르는 것이며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빵을 '야비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일부 시민들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었다.
논란 끝에 이 법안은 이미 귀화했거나 귀화 절차를 밟고 있는 이민자나 그 미망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으로 수정하고 법의 존속기간을 다음 회기 개시 전까지로 한정해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부결,폐기되는 것으로 일단락났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때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 이민자들의 경제적 공헌은 더 있었다. 당시 영국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모직물 생산과 수출이었는데 16세기 중반 들어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때 보다 가볍고,값 싸고,다양한 색상의 제품을 원하는 새로운 시장 수요에 맞는 기술을 들여와 모직물 산업에 활력을 제공한 것이 이민자들이었다.
비단 염색과 비단 직조,다이아몬드 세공,설탕 정제 등 새로운 산업을 일으킨 사람도 이들이었다. 전통적인 모직물 산업의 사양화로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콜체스터,노리치 등 영국의 주요 도시 경제가 살아난 것은 바로 이민자들 덕분이었던 것이다.
허구생 <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