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산되는 新 상생경영] "수출까지 발벗고 지원…우리도 2,3차 협력사와 상생으로 보답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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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 서울엔지니어링 회장
외환위기때 회사 존폐위기 직면
포스코의 현금결제 '가뭄의 단비'
외환위기때 회사 존폐위기 직면
포스코의 현금결제 '가뭄의 단비'
오세철 서울엔지니어링 회장은 1997년 포스코에 고로용 풍구(용광로에 뜨거운 바람을 집어 넣기 위해 만든 장치)를 납품했을 때의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1974년 포스코의 의뢰를 받아 풍구 개발을 시작한 지 23년 만에 독점 공급업체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엔지니어링이 법정관리를 갓 졸업했을 때 포스코는 100% 현금 결제까지 해줬다. 오 회장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 쓰러지던 당시에 현금 결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포스코 현금 결제 덕분에…
서울엔지니어링은 전 세계 고로용 풍구 시장 점유율 1위의 중견기업이다. 1984년 24억원을 못 갚아 부도 처리되면서 1986년엔 법정관리 기업이란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영업이익률 20%대의 알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 비결은 뭘까. 오 회장은 중소기업 스스로 갈고 닦은 품질 경쟁력과 대기업의 상생 협력,두 가지를 동시에 꼽았다.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무조건 대기업에 구매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 시장에 내놔도 손색없는 품질이라면 대기업이 알아서 사가게 마련입니다. "
서울엔지니어링이 풍구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1974년이었다. 당시 포스코는 고로용 풍구 등 핵심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목말라 있었다. 서울대 출신 엔지니어들끼리 의기투합해 서울엔지니어링을 만든 오 회장은 구리를 가공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이에 선뜻 포스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풍구 국산화의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포스코가 제시한 품질 기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까다로웠다. 오 회장은 "1978년에 시험적으로 납품을 했는데 3개월마다 한 번씩 풍구를 빼보곤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불합격시켰다"고 회상했다. "참 야멸치다고 생각했지요. 1981년까지 돈 한푼 못 받고 실험만 했으니까요. 그때 포스코 책임자가 그러데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거냐,최소한 일본 제품과 비슷하기라도 해야 한다고요. " 서울엔지니어링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84년 부도 처리됐다. 오 회장은 빚쟁이들이 몰려온 사무실을 꿋꿋이 지켰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 채권단 대표가 이런 제안을 하더군요. 기술은 좋으니까 일해서 갚으라고요. "
◆"대기업만 쳐다보는 상생은 의미없어"
이를 악문 덕분에 서울엔지니어링은 1997년 드디어 포스코 고로에 들어가는 풍구를 전량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포스코라는 문턱을 넘자 그 다음은 탄탄대로였다. 오 회장은 포스코만 바라봐선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외 시장 개척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해외를 다니면서 그는 20여년을 품질에만 매달려 온 보람을 생생하게 느꼈다. "2000년에 독일 철강업체인 HKM에 200만달러어치를 납품했습니다. 당시 HKM 현장소장이 그러더군요. 포스코도 100% 당신 회사 것을 쓴다는 얘기를 듣고 결정했다고요. "
품질에 관해서는 그렇게 가혹하게만 느껴졌던 포스코도 해외 수출한다고 하니 발벗고 나섰다.
오 회장은 "포스코를 찾아오는 해외 바어어들한테 연락이 많이 온다"며 "포스코에서 풍구는 서울엔지니어링 것을 쓴다고 홍보 역할을 자임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오 회장은 포스코의 상생 경영을 그대로 2,3차 협력업체에도 적용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전' 격인 서울 포스코 본사에 최근 5년간 단 한차례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흔한 청첩장조차 받은 기억이 없단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특히 서울엔지니어링이 법정관리를 갓 졸업했을 때 포스코는 100% 현금 결제까지 해줬다. 오 회장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외환위기의 광풍 속에 쓰러지던 당시에 현금 결제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포스코 현금 결제 덕분에…
서울엔지니어링은 전 세계 고로용 풍구 시장 점유율 1위의 중견기업이다. 1984년 24억원을 못 갚아 부도 처리되면서 1986년엔 법정관리 기업이란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영업이익률 20%대의 알짜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극적인 반전을 이뤄낸 비결은 뭘까. 오 회장은 중소기업 스스로 갈고 닦은 품질 경쟁력과 대기업의 상생 협력,두 가지를 동시에 꼽았다.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무조건 대기업에 구매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 시장에 내놔도 손색없는 품질이라면 대기업이 알아서 사가게 마련입니다. "
서울엔지니어링이 풍구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1974년이었다. 당시 포스코는 고로용 풍구 등 핵심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목말라 있었다. 서울대 출신 엔지니어들끼리 의기투합해 서울엔지니어링을 만든 오 회장은 구리를 가공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이에 선뜻 포스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풍구 국산화의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포스코가 제시한 품질 기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까다로웠다. 오 회장은 "1978년에 시험적으로 납품을 했는데 3개월마다 한 번씩 풍구를 빼보곤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불합격시켰다"고 회상했다. "참 야멸치다고 생각했지요. 1981년까지 돈 한푼 못 받고 실험만 했으니까요. 그때 포스코 책임자가 그러데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거냐,최소한 일본 제품과 비슷하기라도 해야 한다고요. " 서울엔지니어링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84년 부도 처리됐다. 오 회장은 빚쟁이들이 몰려온 사무실을 꿋꿋이 지켰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 채권단 대표가 이런 제안을 하더군요. 기술은 좋으니까 일해서 갚으라고요. "
◆"대기업만 쳐다보는 상생은 의미없어"
이를 악문 덕분에 서울엔지니어링은 1997년 드디어 포스코 고로에 들어가는 풍구를 전량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포스코라는 문턱을 넘자 그 다음은 탄탄대로였다. 오 회장은 포스코만 바라봐선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외 시장 개척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해외를 다니면서 그는 20여년을 품질에만 매달려 온 보람을 생생하게 느꼈다. "2000년에 독일 철강업체인 HKM에 200만달러어치를 납품했습니다. 당시 HKM 현장소장이 그러더군요. 포스코도 100% 당신 회사 것을 쓴다는 얘기를 듣고 결정했다고요. "
품질에 관해서는 그렇게 가혹하게만 느껴졌던 포스코도 해외 수출한다고 하니 발벗고 나섰다.
오 회장은 "포스코를 찾아오는 해외 바어어들한테 연락이 많이 온다"며 "포스코에서 풍구는 서울엔지니어링 것을 쓴다고 홍보 역할을 자임하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오 회장은 포스코의 상생 경영을 그대로 2,3차 협력업체에도 적용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전' 격인 서울 포스코 본사에 최근 5년간 단 한차례도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흔한 청첩장조차 받은 기억이 없단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