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자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후 여러차례 자살을 시도한 한 해병 상병의 사연이 최근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가족에 따르면 피해자는 군복만 봐도 발작을 일으킬 만큼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상병처럼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남성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남성을 강간한 가해자에게 강간죄를 적용(강간죄 객체 확대)하는 방향으로 형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현행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 때문에 '부녀'가 아닌 남성을 강간했을 경우 강간죄가 아닌 강제추행죄가 적용된다.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는 강제추행죄는 강간죄보다 '약한' 처벌이다.

법무부는 지난 25일 형법총칙 개정시안을 발표한 데 이어 형법각칙 개정시안에 남성 강간죄를 넣는 안을 놓고 의논 중이다. 법무부 장관의 자문기구인 형사법개정특별분과위원회에서는 강간죄 객체(대상)에 남성을 포함시키자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한 상태다. 강간죄의 범죄 대상을 '부녀'에서 '사람'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반면 남성 강간죄의 구성 요건을 정하기 위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한국성폭력상담소 전체 상담 건수 1338건 중 남성의 경우는 42건으로 전체의 3.1%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미미한' 수치는 빙산의 일각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남성 강간이 동성애자 등 일부에서만 일어난다는 건 편견"이라며 "사회적 분위기나 시선 때문에 침묵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소하고 싶어도 가해자를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는 현행법상 '대안'이 없다고 여기고 남성 피해자들이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법이 변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남성,피해자는 여성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 탓도 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법과 현실의 괴리를 좁힐 때가 됐다.

이고운 사회부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