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전남 벌교 '태백산맥' 문학기행…벌교에선 상상력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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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소설 밖으로 뛰쳐나온다
정하섭과 소화가 사랑 속삭이고…
야학당 아이들이 구구단 외우고…
정하섭과 소화가 사랑 속삭이고…
야학당 아이들이 구구단 외우고…
대하소설《태백산맥》의 현장을 찾아 나선다.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다. 소설《태백산맥》의 시간과 공간을 아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벌교읍과 순천시의 경계인 진트재에서 기행의 첫발을 내딛는다. 고개 아래 터널은 하대치 등이 순천행 군용열차를 기습해 탈취한 군수품과 무기를 조계산으로 옮기는 작전을 펼치던 곳이다.
멀리 벌교읍을 바라보면서 일본인 지주의 이름을 딴 중도(中島·나카시마)방죽으로 간다. 일제강점기에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20리 방죽 쌓기에 동원됐던 농민들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고 무성한 갈대밭은 말이 없다. 읍내를 향해 걸어가면 염상구가 벌교 제일의 주먹이었던 땅벌과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나' 깡을 부리던 철다리가 나온다. 건너편 천변에 조각배 예닐곱 척이 매여 있다. 소설 속 선창과 창고가 있던 곳이다. 창고는 경찰토벌대의 숙소나 국민보도연맹 단원들을 가두는 감옥으로도 쓰였다.
치열한 이념의 현장에 핀 애틋한 사랑의 꽃
벌교버스터미널 옆길을 따라 오르면 곧장 태백산맥문학관에 닿는다. 정면 벽에는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아마도 작가가 《태백산맥》을 집필한 동기이리라.문학관 옆에는 2008년에 '복원'한 무당의 딸 소화의 집이 있다. 기와지붕인 데다 '꺾여 붙인' 헛간방도 없는 엉성한 집이다.
소화의 집으로 숨어든 빨치산 정하섭과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시작하는 소설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정하섭을 사랑함으로써 하얀 꽃 소화(素花)는 적화(赤花)가 된 셈인가. 제석산 중턱에 우뚝한 현부자집은 솟을대문 위에 2층 누각을 얹은 특이한 구조다. 누각에 올라앉아 기생들을 불러 풍류를 즐기면서 저 아래 중도벌판의 제 논들을 내려다보는 현부자를 떠올리면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조정래의 옛집을 찾아간다.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옆집 주인의 양해를 얻어 옥상으로 올라가 내려다보았다. 슬레이트 지붕에 방이 네 칸이다. 작가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살았던 이 집은 벌교상고 관사였다.
그래도 역사의 핏자국은 지울 수 없다
소화다리를 찾아간다. 철근 콘크리트 다리였던 소화다리는 시멘트 다리로 말끔하게 단장했다. 그러나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던 역사의 핏자국은 어찌 지우랴.소화다리 위쪽엔 벌교의 랜드마크인 횡갯다리(홍교 · 보물 제304호)가 있다. 빨치산들이 지주들에게서 빼앗아 온 쌀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려고 쌓아 놓았던 다리다. 쌀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무지개였던 시절이다. 다리 아래에서는 오리떼가 무정부 상태를 즐기고 있다. 저만치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벌교는 1908년 이전에는 낙안군에 속한 변두리 갯마을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김범우의 집으로 올라간다. 상것들이 엿보지 못하도록 두 길 높이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사랑채 · 겹안채 · 고방채 등의 건물들이 떵떵거리며 살던 지주의 삶을 말해준다. 안채 기둥은 조선시대에 궁궐 외엔 금지했던 둥근 기둥이다.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김범우는 식민지 시기와 분단 과정,민족상잔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서지 못한 한계를 지닌 인물이다. 마당에는 분홍색의 상사화 몇 송이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는 듯 애잔하게 피어 있다.
읍사무소 부근에는 자애병원(벌교어린이집)이 있다. 좌 · 우익 가리지 않고 환자를 치료해주는 자애병원 의사 전명환은 의사의 진정한 직업윤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다.
논산에서 벌교로 전학온 조정래가 다녔던 벌교 북국민학교(벌교여중)를 지나 남국민학교(벌교초교)에 이른다. 전쟁 이후 벌교를 장악한 염상진이 대중연설을 하고 인민재판을 열었던 곳이며 새로 온 계엄사령관들이 열병식을 갖던 곳이다. 벌교초등학교 정문 옆엔 토벌대 숙소였던 남도여관(보성여관)이 있다. 1935년에 "나무 한나한나를 전부 삶아서 지었다"는 목조 여관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듯한 소설 속 군상들
여관 앞 정현동의 술도가(노란나무대문집),경찰서(세운장여관),포목 장사를 하면서 자 눈금을 속이고 쌀 장사하면서 됫박을 속여 돈을 번 광주상회(신협)를 거쳐 남원장(오향왕족발 식당)에 이른다. 최익달,정현동 같은 지주들이 매일 기생을 끼고 앉아 술판을 벌이며 작당모의를 일삼던 요정이 있던 자리다.
벌교역은 염상진의 목을 사흘간이나 내걸었던 곳이다. 형의 시신을 거둠으로써 염상구는 이념보다 피가 훨씬 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차부(우체국)는 고흥 · 순천 · 광주행 시외버스를 타는 정류장이다. 염상구가 좌판 상인들에게 텃세를 부리던 곳이기도 하다.
부용산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염상구의 아지트였던 청년단이 있던 자리엔 노란색 2층 슬래브집이 들어섰다. 염상구는 미워할 수 없는 악한이다.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염상진의 시신을 거두는 장면 등에서는 독자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형 염상진과 대비되면서 민족상잔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돌계단을 밟으며 부용산(192m)공원에 오른다. 시가지는 물론 철교와 벌교 포구,중도방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저기 어딘가에서 소설 속의 인물들이 여전히 숨쉬고 살아갈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더 올라가자 박기동 작사 · 안성현 작곡의 '부용산 노래비'가 나그네를 맞는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이 노래는 혁명가가 되기엔 지나치게 느리고 우울하다.
일제의 곡물 수탈과 함께 토착 지주들의 착취가 많았던 벌교는 이념이 자라기에 알맞은 토양이었다. 온 몸으로 부대끼며 역사를 살았던 275명의 삶이 재현된 벌교라는 공간을 답사하는 내내 '못 믿겠어,너 말고,너를 지녔을 때의 인간(人間)'이라는 유용선의 짧은 시 '이데올로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병기 여행작가
◆찾아가는 길
1번 경부고속국도→천안JC→25번 천안논산고속국도→논산JC→25번 호남고속국도→고서JC→주암IC→27번 국도→15번 국도→2번 국도→벌교읍.대중교통 편은 서울에서 순천까지 버스를 타고 간 뒤 벌교로 이동한다. 약 4시간30분.
벌교서 꼬막 안 먹으면 섭섭하지!
◆맛집
국일식당(061-857-0588)은 40년을 이어온 한정식 백반집이다. 꼬막을 포함한 30여 가지 반찬이 따라 나온다. 꼬막정식 1만3000원.
◆여행팁
국도를 타고 보성 방향으로 1㎞ 남짓 가다 보면 낙성초등학교 조금 지나 왼편으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징광유기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을 따라가다 보면 징광리 원징광마을이 나오고 그 위쪽으로 산비탈에 길게 누운 옹기가마를 볼 수 있다.
징광리 출신의 한창기 선생(1936~1997·도서출판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의 동생 한상훈씨(작고)가 운영하던 '징광옹기'가 있는 곳이다. 한창기는 뛰어난 재야 국어학자였고,문화재 수집가였으며,전통문화의 부흥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1970년대 일주일에 한 번씩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를 열어 절멸 위기에 처했던 판소리를 되살리고 판소리 음반을 제작한 그의 공로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생인 한상훈은 금화산 기슭 22만여평에 우리 고유의 차나무를 심어 징광잎차를 생산함으로써 옛 차맛과 향을 되살려냈다.
징광문화는 이렇게 전통문화에 자신을 바친 두 형제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전통 한옥,차 음식 조리 체험장,민박 한옥이 있어 징광옹기를 구경하고 '징광잎차'를 마실 수 있다. 차 음식 체험관에서는 녹차수제비 (10명 이상 1인당 1만원)도 맛볼 수 있다. (061)857-5064
멀리 벌교읍을 바라보면서 일본인 지주의 이름을 딴 중도(中島·나카시마)방죽으로 간다. 일제강점기에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20리 방죽 쌓기에 동원됐던 농민들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고 무성한 갈대밭은 말이 없다. 읍내를 향해 걸어가면 염상구가 벌교 제일의 주먹이었던 땅벌과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나' 깡을 부리던 철다리가 나온다. 건너편 천변에 조각배 예닐곱 척이 매여 있다. 소설 속 선창과 창고가 있던 곳이다. 창고는 경찰토벌대의 숙소나 국민보도연맹 단원들을 가두는 감옥으로도 쓰였다.
치열한 이념의 현장에 핀 애틋한 사랑의 꽃
벌교버스터미널 옆길을 따라 오르면 곧장 태백산맥문학관에 닿는다. 정면 벽에는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아마도 작가가 《태백산맥》을 집필한 동기이리라.문학관 옆에는 2008년에 '복원'한 무당의 딸 소화의 집이 있다. 기와지붕인 데다 '꺾여 붙인' 헛간방도 없는 엉성한 집이다.
소화의 집으로 숨어든 빨치산 정하섭과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시작하는 소설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정하섭을 사랑함으로써 하얀 꽃 소화(素花)는 적화(赤花)가 된 셈인가. 제석산 중턱에 우뚝한 현부자집은 솟을대문 위에 2층 누각을 얹은 특이한 구조다. 누각에 올라앉아 기생들을 불러 풍류를 즐기면서 저 아래 중도벌판의 제 논들을 내려다보는 현부자를 떠올리면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조정래의 옛집을 찾아간다.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옆집 주인의 양해를 얻어 옥상으로 올라가 내려다보았다. 슬레이트 지붕에 방이 네 칸이다. 작가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살았던 이 집은 벌교상고 관사였다.
그래도 역사의 핏자국은 지울 수 없다
소화다리를 찾아간다. 철근 콘크리트 다리였던 소화다리는 시멘트 다리로 말끔하게 단장했다. 그러나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던 역사의 핏자국은 어찌 지우랴.소화다리 위쪽엔 벌교의 랜드마크인 횡갯다리(홍교 · 보물 제304호)가 있다. 빨치산들이 지주들에게서 빼앗아 온 쌀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려고 쌓아 놓았던 다리다. 쌀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무지개였던 시절이다. 다리 아래에서는 오리떼가 무정부 상태를 즐기고 있다. 저만치 낙안읍성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벌교는 1908년 이전에는 낙안군에 속한 변두리 갯마을이었다.
골목길을 따라 김범우의 집으로 올라간다. 상것들이 엿보지 못하도록 두 길 높이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사랑채 · 겹안채 · 고방채 등의 건물들이 떵떵거리며 살던 지주의 삶을 말해준다. 안채 기둥은 조선시대에 궁궐 외엔 금지했던 둥근 기둥이다.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김범우는 식민지 시기와 분단 과정,민족상잔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서지 못한 한계를 지닌 인물이다. 마당에는 분홍색의 상사화 몇 송이가 옛날의 영화를 그리는 듯 애잔하게 피어 있다.
읍사무소 부근에는 자애병원(벌교어린이집)이 있다. 좌 · 우익 가리지 않고 환자를 치료해주는 자애병원 의사 전명환은 의사의 진정한 직업윤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인물이다.
논산에서 벌교로 전학온 조정래가 다녔던 벌교 북국민학교(벌교여중)를 지나 남국민학교(벌교초교)에 이른다. 전쟁 이후 벌교를 장악한 염상진이 대중연설을 하고 인민재판을 열었던 곳이며 새로 온 계엄사령관들이 열병식을 갖던 곳이다. 벌교초등학교 정문 옆엔 토벌대 숙소였던 남도여관(보성여관)이 있다. 1935년에 "나무 한나한나를 전부 삶아서 지었다"는 목조 여관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 듯한 소설 속 군상들
여관 앞 정현동의 술도가(노란나무대문집),경찰서(세운장여관),포목 장사를 하면서 자 눈금을 속이고 쌀 장사하면서 됫박을 속여 돈을 번 광주상회(신협)를 거쳐 남원장(오향왕족발 식당)에 이른다. 최익달,정현동 같은 지주들이 매일 기생을 끼고 앉아 술판을 벌이며 작당모의를 일삼던 요정이 있던 자리다.
벌교역은 염상진의 목을 사흘간이나 내걸었던 곳이다. 형의 시신을 거둠으로써 염상구는 이념보다 피가 훨씬 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차부(우체국)는 고흥 · 순천 · 광주행 시외버스를 타는 정류장이다. 염상구가 좌판 상인들에게 텃세를 부리던 곳이기도 하다.
부용산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염상구의 아지트였던 청년단이 있던 자리엔 노란색 2층 슬래브집이 들어섰다. 염상구는 미워할 수 없는 악한이다.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염상진의 시신을 거두는 장면 등에서는 독자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형 염상진과 대비되면서 민족상잔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돌계단을 밟으며 부용산(192m)공원에 오른다. 시가지는 물론 철교와 벌교 포구,중도방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저기 어딘가에서 소설 속의 인물들이 여전히 숨쉬고 살아갈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더 올라가자 박기동 작사 · 안성현 작곡의 '부용산 노래비'가 나그네를 맞는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이 노래는 혁명가가 되기엔 지나치게 느리고 우울하다.
일제의 곡물 수탈과 함께 토착 지주들의 착취가 많았던 벌교는 이념이 자라기에 알맞은 토양이었다. 온 몸으로 부대끼며 역사를 살았던 275명의 삶이 재현된 벌교라는 공간을 답사하는 내내 '못 믿겠어,너 말고,너를 지녔을 때의 인간(人間)'이라는 유용선의 짧은 시 '이데올로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병기 여행작가
◆찾아가는 길
1번 경부고속국도→천안JC→25번 천안논산고속국도→논산JC→25번 호남고속국도→고서JC→주암IC→27번 국도→15번 국도→2번 국도→벌교읍.대중교통 편은 서울에서 순천까지 버스를 타고 간 뒤 벌교로 이동한다. 약 4시간30분.
벌교서 꼬막 안 먹으면 섭섭하지!
◆맛집
국일식당(061-857-0588)은 40년을 이어온 한정식 백반집이다. 꼬막을 포함한 30여 가지 반찬이 따라 나온다. 꼬막정식 1만3000원.
◆여행팁
국도를 타고 보성 방향으로 1㎞ 남짓 가다 보면 낙성초등학교 조금 지나 왼편으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징광유기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을 따라가다 보면 징광리 원징광마을이 나오고 그 위쪽으로 산비탈에 길게 누운 옹기가마를 볼 수 있다.
징광리 출신의 한창기 선생(1936~1997·도서출판 뿌리깊은나무 발행인)의 동생 한상훈씨(작고)가 운영하던 '징광옹기'가 있는 곳이다. 한창기는 뛰어난 재야 국어학자였고,문화재 수집가였으며,전통문화의 부흥을 이끈 문화운동가였다. 1970년대 일주일에 한 번씩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를 열어 절멸 위기에 처했던 판소리를 되살리고 판소리 음반을 제작한 그의 공로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동생인 한상훈은 금화산 기슭 22만여평에 우리 고유의 차나무를 심어 징광잎차를 생산함으로써 옛 차맛과 향을 되살려냈다.
징광문화는 이렇게 전통문화에 자신을 바친 두 형제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전통 한옥,차 음식 조리 체험장,민박 한옥이 있어 징광옹기를 구경하고 '징광잎차'를 마실 수 있다. 차 음식 체험관에서는 녹차수제비 (10명 이상 1인당 1만원)도 맛볼 수 있다. (061)857-5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