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가 오르면 돈 가치는 떨어지고,반대로 내리면 올라간다. 물가 상승 또는 하락은 순전히 화폐 가치를 변화시킴으로써 개인의 노력과 무관한 소득재분배를 초래한다. 애써 벌어놓은 소득의 가치를 도둑맞기도 하고 불로소득을 얻기도 한다. 사람들은 물가가 급등하면 현금 대신 부동산과 같은 실물을 보유하고 급락하면 현금을 택한다. 현금은 교환의 매개가 아니라 투기의 수단으로 바뀌고 기업은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투자를 유보한다. 급격한 물가변동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물가 상승은 결국 생산 비용의 상승,또는 수요 증대 때문에 발생한다. 생산 비용이 높아져서 발생하면 '비용추상인플레이션(cost push inflation)'이고,수요가 증대해 발생하면 '수요견인인플레이션(demand pull inflation)'이다. 과거 1970년대 산유국들이 단결해 국제원유가를 대폭 인상했을 때 전 세계가 겪은 물가 상승이 '비용추상인플레이션'이었다. 개도국이 경제 개발 과정에서 통화를 증발해 부족한 저축을 메우면 '수요견인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우리나라는 물가 상승이 우려될 때마다 전기료와 전철요금 등 공공요금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하곤 한다. 정부의 가격 통제는 반시장적이지만,'비용추상'형 요인을 통제해 물가 상승의 압력을 줄이는 효과를 거둔다. 그런데 화폐경제에서 물가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변수는 뭐니뭐니해도 단연 통화량이다. 원래 물가는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량이 적정 수준보다 더 많을 때 상승한다. 물가를 관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통화량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통화량을 관리하는 한국은행은 물가관리의 최종 책임을 진다.

한은은 국민이 부당하게 소득을 빼앗기거나,불로소득을 얻는 일이 없도록 물가관리에 만전을 기해 투기적 요인을 배제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선거철만 되면 선심성 정책사업을 집행해 표를 얻고 싶어 한다. 정부가 한은을 통제하면 선심사업을 벌이고 싶은 정치적 이유로 통화량을 증발해 인플레이션을 불러올 공산이 크다. 중앙은행을 정부로부터 독립시켜야 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물가 안정과 고용 증대는 거시경제정책의 양대 목표다. 그런데 물가 안정을 위해 통화량을 긴축하면 총수요가 감소하여 실업이 늘어난다. 거꾸로 총수요 확대로 고용을 늘리기 위해 통화량을 늘리면 이번에는 물가가 상승한다. 영국의 통계자료로부터 도출한 '필립스곡선(Phillips curve)'은 물가상승률이 낮아지면 실업률이 높아짐을 보여줬다. 총수요관리정책으로는 고용과 물가라고 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함께 잡지 못하는 것이다. 반시장적 총수요관리보다는 실업은 투자 확대로 풀고 물가는 통화관리로 안정시키는 것이 정답이다.

이승훈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