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황금률로 공정한 사회 이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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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만 강조하면 부작용 초래
도덕성 갖고 자율·선택 살려야
도덕성 갖고 자율·선택 살려야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공정(公正)'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공정'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관심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가진 듯하다. 일반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까닭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는 말에서 '공정'의 의미가 왜곡되기도 하고,저소득층에게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공정'의 원칙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공정'이라는 말이 회자되면 될수록 우려되는 바도 그만큼 커진다.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공정'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자.하나는 공정을 평등한 분배나 차별 철폐를 위한 적극적 개입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정을 자신과 남을 재는 잣대를 늘 같게 하는 행위자의 도덕성으로 보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과 황금률('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기독교 윤리)의 적용을 말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전자가 제3자적 관점에서 본 '공정'이라면 후자는 행위자적 관점에서 본 '공정'이다. '공정'을 전자의 의미로만 파악하고,황금률 같은 도덕준칙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경우 적지 않은 부작용을 야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공정한 사회를 이루려면 전자보다는 후자의 정신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분배가 잘 이루어지고,차별이 없어야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이다. 특히 분배는 고양된 시민의식,봉사와 희생과 같은 공동선(共同善)의 맥락에서 호소력을 갖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버드 대학의 존 롤스 교수와 요즈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이론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공정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이는 '공정'이라기보다는 삶의 조건을 교정하는 이른바 교정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가깝다. 여타의 사회적 가치보다 분배와 차별철폐에 집착하면 개인과 사회가 모두 퇴락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를테면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에 세제혜택과 더 많은 교육기회를 부여하는 조치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마는 제3자적 입장에서 개입과 간섭이 수반된다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교정'의 대부분은 정부의 개입으로 구체화된다. 심지어 '공정'의 이름으로 사소한 문제까지 개입하게 된다. 지난 7월에 대통령은 저소득층 대출금리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교정'을 당부하기도 했다.
정부 개입이 낳는 폐해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국가간섭으로 자율과 선택의 원칙을 훼손한다. 그렇다고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차상위 저소득층의 역차별문제를 비롯해 자율학교 전형시 사회적 배려대상을 할당함으로써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또 지나치게 공정을 이상화시키면,조지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빅 브라더'가 등장한다. 따라서 공정을 명분으로 분배와 차별 철폐만을 외치다 보면 전제와 압제라는 매우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사태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공정을 황금률 정신으로 보면,자율과 선택을 존중하고 개입을 줄일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공자의 경구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에서 찾을 수 있다. 공직자의 자기관리에서부터 올바른 부모 역할하기의 해법도 여기에 있다. 늘 엉뚱한 일만 하면서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한들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평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명문학교는 없애라고 하면서 자기 자식들은 외국어고나 조기유학을 보내는 교육계 안팎의 유명 인사들의 위선적 행태는 공정의 원칙에 어긋난다. 분배와 차별 철폐에만 집착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과 행위만으로 공정한 사회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김정래 < 부산교대 교수·교육학 >
'공정'이라는 말이 회자되면 될수록 우려되는 바도 그만큼 커진다.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공정'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자.하나는 공정을 평등한 분배나 차별 철폐를 위한 적극적 개입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공정을 자신과 남을 재는 잣대를 늘 같게 하는 행위자의 도덕성으로 보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과 황금률('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기독교 윤리)의 적용을 말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전자가 제3자적 관점에서 본 '공정'이라면 후자는 행위자적 관점에서 본 '공정'이다. '공정'을 전자의 의미로만 파악하고,황금률 같은 도덕준칙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간주할 경우 적지 않은 부작용을 야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공정한 사회를 이루려면 전자보다는 후자의 정신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분배가 잘 이루어지고,차별이 없어야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이다. 특히 분배는 고양된 시민의식,봉사와 희생과 같은 공동선(共同善)의 맥락에서 호소력을 갖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하버드 대학의 존 롤스 교수와 요즈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이론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공정을 과도하게 강조하면,이는 '공정'이라기보다는 삶의 조건을 교정하는 이른바 교정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가깝다. 여타의 사회적 가치보다 분배와 차별철폐에 집착하면 개인과 사회가 모두 퇴락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를테면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에 세제혜택과 더 많은 교육기회를 부여하는 조치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마는 제3자적 입장에서 개입과 간섭이 수반된다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교정'의 대부분은 정부의 개입으로 구체화된다. 심지어 '공정'의 이름으로 사소한 문제까지 개입하게 된다. 지난 7월에 대통령은 저소득층 대출금리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하면서 '교정'을 당부하기도 했다.
정부 개입이 낳는 폐해라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국가간섭으로 자율과 선택의 원칙을 훼손한다. 그렇다고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차상위 저소득층의 역차별문제를 비롯해 자율학교 전형시 사회적 배려대상을 할당함으로써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또 지나치게 공정을 이상화시키면,조지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빅 브라더'가 등장한다. 따라서 공정을 명분으로 분배와 차별 철폐만을 외치다 보면 전제와 압제라는 매우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사태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공정을 황금률 정신으로 보면,자율과 선택을 존중하고 개입을 줄일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공자의 경구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에서 찾을 수 있다. 공직자의 자기관리에서부터 올바른 부모 역할하기의 해법도 여기에 있다. 늘 엉뚱한 일만 하면서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한들 아이들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평준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명문학교는 없애라고 하면서 자기 자식들은 외국어고나 조기유학을 보내는 교육계 안팎의 유명 인사들의 위선적 행태는 공정의 원칙에 어긋난다. 분배와 차별 철폐에만 집착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과 행위만으로 공정한 사회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김정래 < 부산교대 교수·교육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