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뉴스]5살짜리에 관직 준 고려시대 '음서제'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음서
고려는 초기부터 5품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귀족사회의 성립기반을 닦았다.고려 7대왕인 목종때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음서제는 고려시대 전시기를 통해 일반화돼 귀족의 자손은 이 통로를 거쳐 관리에 등용되고 가문의 덕택으로 고관의 지위까지 오른 경우가 많았다.한마디로 고려시대 음서는 과거와 쌍벽을 이루는 관리 등용의 양대기둥이었다.
하지만 초기 문음 출신들은 문한·학관직과 지공거직에 취임할 수 없는 등 제약이 있었다.이에 따라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던 전원균이나 김방경 같은 사람들은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고려 후기로 갈수록 음서제는 편법으로 운영되면서 인사행정의 난맥상과 결부되면서 변질되고 확대되기에 이른다.특히 무신정권과 몽고간섭을 거치면서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인사행정이 난맥상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고려사』는 이에 대해 “권신이 사사롭게 정방을 설치한 때부터 인사행정이 뇌물에 의해 이뤄졌고 銓法이 크게 무너지고 科目에 의한 取士도 따라 범람해져서 黑冊의 비방과 粉紅의 비난이 일시에 전파되 고려의 業은 드디어 쇠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黑冊의 비방’이란 표현 중 黑冊은 아동들이 두꺼운 종이에 검게 칠하고 기름을 먹여 글씨연습을 하던 연습장으로,새로운 인사명령 명단에 권문세가들이 뇌물을 받고 다투어 서로 지우고 고쳐 써넣어 朱色과 黑色을 분별하기 어려웠다며 비꼰 표현에서 나온 말이다.
‘粉紅의 비난’이란 표현은 과거에서 합격자를 공정하게 선발하지 않고 대부분 세도가의 젖비린내 나는 아동들을 뽑은 사실을 두고 당시인들이 아동들이 분홍옷 입기를 좋아한 것에 빗대 ‘粉紅牓’이라고 폄하한 데서 기인했다.아동이라 불린 것은 실제로 13∼14세의 명문가 자녀들이 다수 과거에 합격한 탓도 있고,단순히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배움과 학문의 수준이 과거에 합격할 만한 정도가 되지 못했음에도 부정에 의해 선발된 것을 비꼬는 의미도 있었다.
여기에 특권신분층 자손들은 初蔭職으로 출발,일종의 예비고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본고사에 응시해 수월하게 과거에 급제해 합법적으로 신분을 세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이에 따라 음서출신자의 약 40%가 과거에 합격하며 한단계 높이 올라가기도 했다.
고려 후기가 되면,고려사회를 지배하는 권문세족(權門世族)은 14세기경에는 △고려전기부터 내려온 문벌귀족가문 △무신정권 시대 무장으로 득세한 가문 △무신란 이후 능문능사(能文能使)의 신관인층(新官人層)으로 대두한 세력 △대원관계 속에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집안 등 네갈래로 재편되게 된다.이에 따라 충선왕 복위년(1308)에는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이 ‘宰相之宗’으로 지정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고려 후기 지배세력들은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음서제를 이용해 자손에게 벼슬을 시키면서 대대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했다.또 왕실 및 벌족들과 중첩되는 혼인을 맺어 혈연의 범위를 한정시켜 가면서 가문의 중요성을 내세우기도 했다.그들은 새로운 귀족들로서 친원적 성향이 강했고 경제적으로는 사적인 대토지소유자인 농장주로 평가된다.
이들이 득세한 시기가 되면 음서직의 값어치가 올라가는 것도 주목되는 현상이다.당초 음서직은 과거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고려후기에 이르면 음서직의 위계가 크게 높아져 과거가 부럽지 않을 수준이 되게 된다.
고려전기에는 실무와 관계없는 品官同正과 吏屬同正이 음서의 주류를 이루고 얼마간의 吏屬職과 權務職,品官職 등 實職이 주어졌지만 후기에는 이와 반대로 권무직과 무반의 品官實職이 대부분이고 동정직을 초음직으로 준 예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고려후기에 들어서 음서로 얻는 초음직이 상급직위로 변환되면서 음서출신자들이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기간도 그만큼 단축됐다.특히 음서직은 대체로 이른 나이에 주어진 만큼,과거에 비해 빠른 출세가 보장되면서 문벌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됐다.
실제 『고려사』선거지 음서조에 따르면 “모든 음서출신자는 18세 이상으로 한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음서를 받은 사람의 70% 가까이가 17세 이하에서 음서를 제수받았다.음서를 제수받은 최저연령은 5세였고,평균 연령은 15.4세였다고 한다.특히 고려 전기에서 의종 때까지는 평균 17.2세이던 음서제수 연령이 충렬왕-충목왕 시기에는 13.7세,공민왕-공양왕 기간에는 12.3세로 낮아지는 등 후기로 갈수록 음서혜택을 받는 연령이 낮아졌다.
현대판 음서논란으로 사회가 시끄러운 것을 계기로 고려 후기의 음서제 모습을 정리해 봤다.천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고위 관료들의 행보는 실제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해 씁쓸한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천여년 뒤 미래의 역사가들은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관료충원 행태를 보고,천년동안 어떤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고 기술할 수 있을지 적잖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역사는 과연 반복되는 것일까,발전하는 것일까.
<참고한 책>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3-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9-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6
이기백, 고려귀족사회의 형성, 일조각 2000
김동욱 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http://blog.hankyung.com/raj99/2692331
고려는 초기부터 5품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문음(門蔭)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귀족사회의 성립기반을 닦았다.고려 7대왕인 목종때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음서제는 고려시대 전시기를 통해 일반화돼 귀족의 자손은 이 통로를 거쳐 관리에 등용되고 가문의 덕택으로 고관의 지위까지 오른 경우가 많았다.한마디로 고려시대 음서는 과거와 쌍벽을 이루는 관리 등용의 양대기둥이었다.
하지만 초기 문음 출신들은 문한·학관직과 지공거직에 취임할 수 없는 등 제약이 있었다.이에 따라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던 전원균이나 김방경 같은 사람들은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고려 후기로 갈수록 음서제는 편법으로 운영되면서 인사행정의 난맥상과 결부되면서 변질되고 확대되기에 이른다.특히 무신정권과 몽고간섭을 거치면서 정치기강이 문란해지고 인사행정이 난맥상이 두드러지게 되는데.
『고려사』는 이에 대해 “권신이 사사롭게 정방을 설치한 때부터 인사행정이 뇌물에 의해 이뤄졌고 銓法이 크게 무너지고 科目에 의한 取士도 따라 범람해져서 黑冊의 비방과 粉紅의 비난이 일시에 전파되 고려의 業은 드디어 쇠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黑冊의 비방’이란 표현 중 黑冊은 아동들이 두꺼운 종이에 검게 칠하고 기름을 먹여 글씨연습을 하던 연습장으로,새로운 인사명령 명단에 권문세가들이 뇌물을 받고 다투어 서로 지우고 고쳐 써넣어 朱色과 黑色을 분별하기 어려웠다며 비꼰 표현에서 나온 말이다.
‘粉紅의 비난’이란 표현은 과거에서 합격자를 공정하게 선발하지 않고 대부분 세도가의 젖비린내 나는 아동들을 뽑은 사실을 두고 당시인들이 아동들이 분홍옷 입기를 좋아한 것에 빗대 ‘粉紅牓’이라고 폄하한 데서 기인했다.아동이라 불린 것은 실제로 13∼14세의 명문가 자녀들이 다수 과거에 합격한 탓도 있고,단순히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배움과 학문의 수준이 과거에 합격할 만한 정도가 되지 못했음에도 부정에 의해 선발된 것을 비꼬는 의미도 있었다.
여기에 특권신분층 자손들은 初蔭職으로 출발,일종의 예비고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본고사에 응시해 수월하게 과거에 급제해 합법적으로 신분을 세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이에 따라 음서출신자의 약 40%가 과거에 합격하며 한단계 높이 올라가기도 했다.
고려 후기가 되면,고려사회를 지배하는 권문세족(權門世族)은 14세기경에는 △고려전기부터 내려온 문벌귀족가문 △무신정권 시대 무장으로 득세한 가문 △무신란 이후 능문능사(能文能使)의 신관인층(新官人層)으로 대두한 세력 △대원관계 속에서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집안 등 네갈래로 재편되게 된다.이에 따라 충선왕 복위년(1308)에는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가문이 ‘宰相之宗’으로 지정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고려 후기 지배세력들은 고위 관직을 차지하고 음서제를 이용해 자손에게 벼슬을 시키면서 대대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했다.또 왕실 및 벌족들과 중첩되는 혼인을 맺어 혈연의 범위를 한정시켜 가면서 가문의 중요성을 내세우기도 했다.그들은 새로운 귀족들로서 친원적 성향이 강했고 경제적으로는 사적인 대토지소유자인 농장주로 평가된다.
이들이 득세한 시기가 되면 음서직의 값어치가 올라가는 것도 주목되는 현상이다.당초 음서직은 과거보다 못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고려후기에 이르면 음서직의 위계가 크게 높아져 과거가 부럽지 않을 수준이 되게 된다.
고려전기에는 실무와 관계없는 品官同正과 吏屬同正이 음서의 주류를 이루고 얼마간의 吏屬職과 權務職,品官職 등 實職이 주어졌지만 후기에는 이와 반대로 권무직과 무반의 品官實職이 대부분이고 동정직을 초음직으로 준 예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처럼 고려후기에 들어서 음서로 얻는 초음직이 상급직위로 변환되면서 음서출신자들이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기간도 그만큼 단축됐다.특히 음서직은 대체로 이른 나이에 주어진 만큼,과거에 비해 빠른 출세가 보장되면서 문벌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됐다.
실제 『고려사』선거지 음서조에 따르면 “모든 음서출신자는 18세 이상으로 한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음서를 받은 사람의 70% 가까이가 17세 이하에서 음서를 제수받았다.음서를 제수받은 최저연령은 5세였고,평균 연령은 15.4세였다고 한다.특히 고려 전기에서 의종 때까지는 평균 17.2세이던 음서제수 연령이 충렬왕-충목왕 시기에는 13.7세,공민왕-공양왕 기간에는 12.3세로 낮아지는 등 후기로 갈수록 음서혜택을 받는 연령이 낮아졌다.
현대판 음서논란으로 사회가 시끄러운 것을 계기로 고려 후기의 음서제 모습을 정리해 봤다.천여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고위 관료들의 행보는 실제로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해 씁쓸한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다.천여년 뒤 미래의 역사가들은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관료충원 행태를 보고,천년동안 어떤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고 기술할 수 있을지 적잖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역사는 과연 반복되는 것일까,발전하는 것일까.
<참고한 책>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3-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99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19-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6
이기백, 고려귀족사회의 형성, 일조각 2000
김동욱 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http://blog.hankyung.com/raj99/269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