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읽은,한 장관 부인의 회고록엔 6 · 25 전쟁 중 피란지인 부산에서 당시 애인이던 남편의 군용 지프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었고,남편이 후진국 대사로 근무할 땐 그곳에서 마땅한 커튼 감을 구하지 못해 도리없이 딴 나라에 가서 사왔다는 대목이 나온다.

남편의 극진했던 사랑에 대한 추억과 외교관 아내로서 관저를 잘 꾸미기 위해 애썼다는 표현이었겠지만 읽는 입장에선 충격이었다. '아,이렇게 산 사람도 있구나' 싶은 한편 이런 이가 생각한 가난이나 서러움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가난에 대해 글짓기를 하랬더니 '우리 집은 가난하다. 정원사도 가난하고,가정부도 가난하고,운전사도 가난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는 얘기가 생각나면서 쌀이 없어 수제비나 국수로 끼니를 때우는 이들이 수두룩했던 시절 그는 혹시 '밥 없으면 빵 먹으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건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었었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고통이나 심정을 모른다. 갑과 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을은 갑이 갑자기 잘해줘도 좋긴커녕 이러다 어쩌려고 그러나 싶어 두려운데 갑은 이런 을의 심정을 알지 못한다. 갑이 기껏 호의라고 한 일에 대해 을이 종종'고양이 쥐 생각하는 척 말라'고 나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갑과 을 하면 보통 업무상 계약관계 당사자를 뜻하지만 어느 사회에나 보이지 않는 갑이 존재한다. 공무원, 특히 고위공무원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한동안'공무원은 머슴'이란 말이 유행했지만 일부의 태도는 머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30대 초반 사무관이 30년 이상 현업에서 근무한 업계 임원들을 오라가라 하고 눈곱만큼이라도 싫은 소리를 하면 어디서 온 누구냐며 은근슬쩍 협박성 태도를 보이는 게 현실이다. 갑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괘념치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군말 없이 듣고 비위를 맞춰주니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업무상 을이 아니라도 살다 보면 수시로 을의 처지에 놓이는 게 보통사람이다. 을이 되면 상대의 신경을 거스를까 말 한마디도 조심한다. 37년 만에 공직을 물러나면서'남의 견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는 외교장관의 말은 고위공직자들이 음양으로 받는 사회적 대우에 함몰돼 평생'갑'으로 산다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