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PC업체인 휴렛팩커드(HP)가 성추문으로 물러난 마크 허드 전 최고경영자(CEO · 53)의 오라클 취업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이 그를 공동 사장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이뤄진 조치다.

8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HP는 이날 허드 전 CEO가 경쟁사인 오라클로 취업하는 것은 영업 비밀 유출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부당하다며 캘리포니아주 법원에 소송을 냈다. 5년 동안 CEO로 재직했던 사람이 불명예 퇴진한 뒤 경쟁사로 가게 되면 자칫 영업 비밀이 흘러들어가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조치로 풀이된다.

소장에 따르면 HP는 허드 전 CEO가 오라클에서 일하게 되면 HP와 관련한 비밀 유지 조항을 계속 위반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HP는 법원에 허드 전 CEO가 HP와 비밀유지 조항을 지키는지를 정기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특별관(special master)을 지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오라클의 래리 엘리슨 CEO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그동안 협력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HP가 적대적인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양사의 우호적인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오라클은 한때 HP의 마케팅 파트너였지만 최근 들어 HP의 핵심 사업인 기업용 컴퓨터쪽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왔다. 오라클은 미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한 신고서에서 허드 전 CEO가 판매와 마케팅을 담당하고 해외 비즈니스 자문을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파트너 관계이던 인텔과 시스코시스템스가 서로 경쟁사로 바뀌었듯,사업 영역을 서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HP와 오라클도 옛 동지에서 적으로 변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허드 전 CEO가 성추문 사건으로 회사에서 물러난 데 대한 섭섭한 감정도 오라클행을 결심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HP는 당시 허드 전 CEO가 회사의 성적학대 규정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기업인 행동 강령을 어겼다고 밝혔다. 이후 허드 전 CEO는 3500만달러의 퇴직 수당을 받으면서 회사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로 계약을 맺었다.

법원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에 대한 전망도 엇갈린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임직원이 경쟁사로 가는 것을 법적으로 막기 어렵지만 직급이 높으면 제동을 거는 게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관점도 적지 않다고 WSJ는 전했다. 시장에서는 하드웨어 관련 영업 전략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라클의 허드 전 CEO 영입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다. 이날 오라클 주가는 6%가량 올랐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