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에 있는 연습실로 일본인 제자들이 한국 무용을 배우러 와요. 한 발로 딛고 서서 몇 분씩 서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스승의 무용복을 세심하게 다려 놓는 정성에도 놀라죠.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인데 일본인 제자들을 보면 기분이 참 묘합니다. "

천명선씨(51 · 사진)는 한국보다 일본이나 동남아에서 더 잘 알려진 한국무용가. 오는 13~17일 필리핀의 종합사관학교인 PMA(Philippines Military Academy)와 필리핀관광청 초청으로 바기오시에서 '명무 천명선과 한국전통예술 명인들의 향' 공연을 펼친다. 그는 요즘 서울과 경주,일본을 오가며 공연준비에 한창이다.

8일은 60년 전 필리핀 정부가 6 · 25 전쟁에 7400여명의 군인을 파병한 참전기념일.천씨는 매년 이맘때면 바쁜 스케줄을 쪼개 필리핀을 찾는다. "당연히 비상업적인 공연이죠.참가하는 국악인들 상당수가 비용을 보태요. 우리 춤과 음악을 통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참전 군인들을 위로하고 사관생도들에게 아름다운 보은의 마음을 전하는 자리니까요. 무엇보다 현지인들이 한국 전통예술을 참 좋아해요. 한국춤의 감동을 우리 국민들이 더 모르는 거 아세요?"

그는 올해 우리 정부가 PMA에 건립해준 한국전참전기념비 앞에서 '기원무' 퍼포먼스를 펼친 후 본공연에선 '교방무'와 '타고무'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필리핀관광청장이 직접 참관하고 현지 유력 TV방송국(ABS CBN)이 생중계한다.

그는 국내에서도 전주대사습전국국악경연대회나 대구국악제 등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지만 역시 주무대는 해외다. 1997년부터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가나가와본부의 문화추진위원장으로 현지 8 · 15행사 및 한 · 일 친선문화 등의 예술총감독을 맡고 있다. 해외 공연도 100회를 넘었다. 그야말로 민간 '문화 사절'인 셈이다.

그는 전통계승에 대해 확고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악이나 전통예술이 인기가 없잖아요. 그렇다보니 서양의 장르와 '퓨전화'에 나서는 경향이 강해요. 나름대로 변화를 꾀하는 것일텐데 원래 우리 전통예술이 지니고 있는 핵심적인 정신과 형태를 보존하고 세련되게 다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면에서는 오히려 교포 예술인들의 자부심이 더 큰 것 같아요. "

대구 태생인 그는 7세 때 한국 무용에 입문해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과 박초향 선생에게 사사했다. 1980년대 초 일본을 오가며 공연하다 스물다섯 살에 재일교포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타고난 춤꾼의 삶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교방무'는 외국인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이 춤은 고려 · 조선시대 기녀들을 중심으로 가무를 가르치던 교방(敎坊)에서 추던 것으로 동작이 복잡하고 즉흥성이 강하다. 한(恨)과 흥(興),태(態),멋 등 한국춤의 요소를 고루 갖춰 외국 관객들도 눈물을 쏟게 만든다. 일본 공연에서 한 주부가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방영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국춤이 지루하다는 한국인들이 많아요. 고개 한 번 숙이고 팔 한 번 뻗는 데 한참이잖아요. (웃음) 그런데 제대로 한 번 보고 말씀하면 좋겠어요. 마음을 열고 가락에 맞춰 무용수의 몸짓을 보면 의외로 섹시하고 애절하고 아름답고 가냘프고 강해요. "

이번 필리핀 공연에는 천씨 이외에도 김은실, 원미희, 황진경, 박지연, 정유나씨 등 여성국악예술단 '여우락'과 국악가수 지정이,무용가 이금연 이서현,모녀국악인 이은자 예현정,대금 명인 문동욱,곽태천 영남대 한국음악과 교수 등이 참여한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