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은 도둑처럼 찾아오죠.어느 순간 머리를 탁 치면서.선적 깨달음의 순간과 같다고 할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결정적인 모멘트.빛이 한순간 뜨는 것 같아요. 자다가 놀라 깬 적도 많습니다. 스물세 살 무렵 어느 날 꿈을 꿨어요. 한강변 언덕바지에서 강을 내려다 보는데 시선이 강물 내부로 줌인되는가 싶더니 물속의 돌들이 굴러서는 먼지로 바뀌고 또 물로 바뀌는 거예요. 아,돌과 물이 하나로구나. 그런 생각이 종처럼 머리를 치는 순간 화들짝 잠에서 깼죠.그때 그 충격이 지금까지도 강렬해요. 내 작업이 그때 꿈의 연장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

설치미술가 김수자씨(53).10여년 전부터 뉴욕과 파리에 거주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가 한국에서 또 하나의 대형 프로젝트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지난 주말부터 오는 19일까지 전남 영광 원자력발전소에서 선보이는 멀티채널 비디오 작품 '지 · 수 · 화 · 풍(地水火風)'.원자로 냉각수를 방류하는 바다의 제방(방류제) 1136m에 대형 스크린 6개를 설치하고 넘실대는 파도와 이글거리는 용암,그린란드의 빙하 등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원자력발전소와 설치예술의 만남은 그가 스물세 살 때 꾼 꿈의 한 장면과 오버랩된다. 돌과 물이 하나의 본성을 지녔다는 깨달음.그래서 흙 · 물 · 불 · 공기의 4원소는 영광 앞바다의 바람 속에서 한몸을 이루며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한다. 자연의 물질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생성 · 변화 · 소멸의 순환구조를 이룬다는 것은 그가 여태껏 해왔던 '바늘''보따리''거울' 연작처럼 우주와 교감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상 도구를 통해 융합과 통섭의 의미를 탐구해온 그가 원자력발전소를 택한 것은 "자연 물질의 하나이자 창조와 파괴의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 원자력 에너지가 상처와 치유의 양면성을 지닌 바늘과도 상통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어머니와 이불을 꿰매다 바늘 끝이 이불보에 닿는 순간 우주적인 에너지를 느꼈어요. 음양의 구조처럼 굉장한 에너지였죠.원자력 에너지도 그렇습니다. 양날의 칼을 가졌지만 삶과 죽음,자(自)와 타(他),들숨과 날숨,이런 것들의 고리와 통합 성질을 함께 지녔잖아요. 예를 들어 이번 작품 중 분출하는 용암이 바위와 돌,먼지,공기로 변하는 과정 등을 통해 창조와 변화,생성과 소멸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었어요. "

어둠이 내리는 방류제 위로 스페인 란자로테 사화산 부근의 파도와 과테말라 파카야 활화산의 이글거리는 용암,그린란드의 빙하 풍경이 펼쳐지는 모습은 '장소특정적 예술(site-specific art)'의 백미라 할 만하다. "'지 · 수 · 화 · 풍'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워터 오브 에어'는 올여름에 헬리콥터를 타고 그린란드의 빙하를 촬영한 거예요. "

대구에서 태어나 홍익대 회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980년대 판화 작업을 거쳐 1983년 바늘로 꿰매는 행위에서 영감을 얻은 뒤로는 천과 바느질을 이용한 콜라주 · 드로잉 · 채색 작업에 열중했다. 이를 통해 캔버스 · 물감 · 붓으로 대변되는 서양화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확립했고 1992년 이후 천을 이용한 보따리 작업으로 이름을 떨쳤다.

"캔버스 대신 이불보를 사용했는데 2차원적인 평면을 3차원적인 공간으로 푸는 것이었죠.'찌르고 꿰매는' 바느질이 '보듬어 싸는' 보따리로 넘어가게 된 겁니다. 뒤돌아보면 이런 과정들은 뭘 계획하고 발전시켰다기보다 꿰맨다는 행위 속에 이미 내재돼 있었던 거죠.꿰맨다는 것도 실을 통해 싸는 행위잖아요. 그 속성을 뽑아내고 재인식하는 것이 제 일이에요. "

1990년대 후반에는 보따리를 싸서 트럭에 싣고 전국을 돌며 행한 퍼포먼스 비디오 작품 '보따리 트럭-2727킬로미터'로 화제를 모으며 예술적 영역을 더 확장했다.

"'보따리 트럭' 작업 때 제가 살았던 곳을 찾아 11일 동안 전국을 돌면서 내 삶이 바로 이런 거였구나 하고 깨닫게 됐어요. 아버지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이곳저곳을 많이 떠돌았어요. 정들고 익숙할 만하면 1,2년 후에 떠나고….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만나는 삶의 연속이었는데 이런 것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줬지요. "

그의 말은 나뭇잎처럼 부드럽고 섬세했지만 그 속에는 튼실한 뿌리와 단단한 마디가 동시에 들어 있는 듯했다. 조용조용 말을 이어가는 그의 내면 어느 곳에 이런 치열함이 감춰져 있을까. 그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성격이어서 그런지 타인의 아픔과 빈곤,신체적 고통,정신적 고난 등에 민감했다고 한다. 남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것.그것은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세상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의사인 남편을 따라 소록도에서 2년간 생활할 때 그는 작품을 한 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삶을 모방한다는 생각 때문에' 허투루 작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삼남매 중 맏이여서 그런가.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밴 것 같다. 미술가가 아니었다면 문인이나 철학자가 됐을 법도 하다. "어릴 때 선생님께서 장래 희망을 적어보라고 하기에 화가와 웅변가(철학가)라고 썼는데,전 지금도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아요. 음악도,운동도 다 했었죠.농구선수와 육상선수로 뛰기도 했고… 호기심이 많아 제가 경험하고 싶고 알고 싶은 건 다 해봤어요. "

그는 인터뷰 다음 날 폴란드로 떠난다고 했다. 다음 달 아셈정상회의와 함께하는 포즈난 비엔날레에 참가하기 위해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히틀러의 사무실을 설치하는 공간을 배정받았어요. 그곳에서 설치작품을 전시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폴란드에서 구입한 헌 옷과 티베트 승려들의 독송 등을 활용할 겁니다. "

언젠가는 김해김씨 시조모 허황옥의 고향인 인도의 아요디야(아유타)에 가 자신의 뿌리와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는 희망도 들려줬다. 뉴욕과 파리,서울 등을 바삐 오가면서도 그는 여전히 호기심 넘치고 할 일이 많다. 그곳이 어디든,어떤 모습이든 미술이란 그에게 늘 '자아와 세계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