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베테랑이 手작업으로 생산
신제품 위해 작은 통서 미리 숙성
업계 최초 일반인에 공정 공개도
디아지오와 페르노리카에 이은 세계 3위 위스키업체이자 연간 800만ℓ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판매하는 세계 최대 싱글몰트 위스키 회사인 윌리엄그랜트앤선즈 계열사 글렌피딕의 현장이다. 이곳의 술맛을 책임지는 브라이언 킨즈먼 몰트마스터는 "대형 오크통은 숙성기간이 길다 보니 맛과 향을 예측하기 힘들다"며"숙성기간이 빠른 조그만 통에 일부 옮겨담은 뒤 개략적인 맛의 트렌드를 미리 살펴 신제품을 준비한다"고 설명했다.
◆40년 경력 '장인' 즐비
글렌피딕과 발베니 증류소가 있는 더프타운은 인구 4000여명.한국으로 치면 면(面) 수준의 작은 마을이다. 하지만 이 시골 마을이 스코틀랜드를 먹여 살리는 위스키 산업의'수도'로 불린다. 마을 주변을 흐르는 피딕(Fiddich · 사슴)강을 젖줄 삼아 글렌피딕 외에도 드워스,제이앤드비 등 유명 위스키 브랜드들이 몰려있는 위스키 명산지기 때문이다.
쟁쟁한 기업들이 비슷한 장소에서 제품을 생산하다 보니 서로 강조하는 부분에서도 차이가 있다. 1886년 설립된 윌리엄그랜트앤선즈는 전통(heritage)을 유난히 강조한다. 일반 블렌디드 위스키가 호밀,옥수수 등 곡물을 여러 증류소에서 섞는데 비해 싱글몰트 위스키엔 맥아(발아시킨 보리의 낟알) 한 가지만 들어간다.
이 회사는 4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 장인들이 즐비할 뿐 아니라 맥아의 가공,발효,건조 및 증류,숙성의 전 단계에서'전통 방식'을 고집한다. 25년간 효모 관리만 했다는 닐 로씨는 "첨단 기계를 사용하면 더 빨리 맥아를 발효시킬 수 있지만 특유의 과일향을 위해 다른 회사보다 하루 더 길게,3일간 발효시킨다"고 말했다.
증류도 120여년 전 창업주가 설계하고 도입한 예전 방식을 고집한다. 발베니 증류소에선 아예 원료로 사용되는 보리의 상당량을 직접 재배해 쓴다. 전 세계 수요가 늘면서 부족해진 부분은 주변 농가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산한 것으로 충당한다. 하루 네 번씩 삽으로 맥아를 뒤집어 건조하는 업무만 담당하는 이들은 한방향으로 수십년간 삽질만 하다 보니 등이 굽어 '몽키 숄더(원숭이 어깨)'라 불리기도 한다. 회사 한켠에선 5명의 통 제조업자(cooper)들이 하루 25개의 오크통을 전통방식으로 수선하는 소리로 망치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위스키병의 디자인과 용량도 창업 당시 것을 고수한다.
데이비드 메이어 발베니 홍보팀장은 "위스키 제조공정을 전산화하면 경제성을 높일 수 있지만 맛과 향을 유지하기 위해 수작업을 고집하고 있다"며 "스코틀랜드에서도 보리재배,발효,증류 등을 전통방식으로 고집하는 업체는 3~4개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술을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인지,술 속에 담긴 역사와 전통을 파는 것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전통과 혁신의 조화
글렌피딕은 전통을 제1 모토로 내세운다. 1963년 오크통 단위로만 팔던 싱글몰트 위스키를 병 단위로 팔기 시작한 첫 회사기도 하다. 퍼거스 심슨 글렌피딕 증류소 홍보담당은 "예전에는 스코틀랜드 이외 지역에선 통당 수천만~수억원 하는 오크통을 살 수 있는 부자들만 싱글몰트 위스키를 맛볼 수 있었다"며 "글렌피딕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병 판매를 시작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고 전했다.
싱글몰트 위스키를 일반 브랜드 위스키처럼 병입 판매한다는 생각,해외 시장을 개척한다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결단이 이 회사를 지난해 180여개국에 87만상자(1상자는 9ℓ)나 팔아 치우며 싱글몰트 위스키 최강자로 우뚝 서게 한 비결이다.
글렌피딕은 독특한 향에 맛도 강하다. 그러나 회사 측은 다양성이 부족한 싱글몰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각종 실험을 병행해 왔다. 셰리 오크통과 버번 오크통에서 각각 숙성된 위스키 원액은 대형 통에 옮겨진 뒤 최적의 맛과 향을 내기 위해 섞는 '결혼'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주류법상 오크통을 바꿀 경우 이전 숙성기간을 인정받지 못하는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맛과 향을 위한 혁신을 도입한 것이다. 여기에 40여년 전 업계 최초로 비즈니스 센터를 열고 일반인들에게 위스키 제조 전(全)공정을 공개한 점도 혁신적인 사풍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모든 시작은 품질에서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떠받치는 기반에는 100여년간 지속된 품질지상주의가 있다. 위스키 맛은 물이 결정한다는 신념에 따라 스코틀랜드 오지인 스페이사이드의 천연수 '로비듀'만을 사용한다. 최상급 보리 2만3330알로 위스키 한 병을 만든다고 분석할 만큼 제조 공정도 철저하게 관리된다. 두 차례 증류를 거쳐 나온 주정을 3분(分)해 머리(5%)와 꼬리(50%)로 불리는 부분은 재증류하고 '심장'이란 이름이 붙은 45%만 위스키로 만들 정도다. 12 · 15 · 18년이 넘게 숙성된 원액이라도 몰트마스터 승인이 없으면 이를 인정받지 못하고 한 단계 낮은 등급이 매겨진다. 몰트마스터는 매일 100~200개 위스키 샘플의 맛과 향을 보며 업계 트렌드와 자체 제품 품질을 검사한다.
스텔라 데이비드 윌리엄그랜트앤선즈 최고경영자(CEO)는 "한국과 대만에서 쿠퍼를 초청한 VIP 시연회를 갖는다든지, 다른 위스키 업체들은 흉내 내지 못하는 '50년산 특별판'같은 한정판을 지속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근간엔 오랜 역사와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더프타운(스코틀랜드)=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