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자동차 산업 보호 겨냥, 시간벌기 작전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이탈리아의 반대에 발목이 잡혔다.

EU는 13일 정례 일반관계이사회를 열어 한-EU FTA 승인 여부를 논의했으나, 이탈리아가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음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오는 16일 정상회의로 넘겼다.

이에 따라 지난해 10월 가서명된 한-EU FTA를 연내에 발효시킨다는 일정에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 이탈리아 왜 반대하나 = 이탈리아가 다른 26개 EU 회원국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반대 입장을 고수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동차 산업 보호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섬유산업에 대해서도 EU 역외 제품의 경우 원산지 표시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나, 핵심은 자동차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인 피아트의 경우 현재 스포츠카 전문 브랜드 페라리를 비롯해 대중적인 차량인 피아트, 란치아, 알파로메오 등의 브랜드를 생산하고 있으나 2008년 말 발생한 세계 경제위기 이후 경영상의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피아트는 지난해 2분기 1억6천800만 유로의 적자를 기록했다가 올해 2분기에는 9천만 유로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소형 승용차와 농업용 기계 부문의 매출 신장으로 겨우 적자를 면했다.

독일과 프랑스 등에 비해 자동차 산업의 브랜드 파워가 상대적으로 약한 이탈리아가 그나마 경쟁력을 가진 부문이 소형차인데 한국차가 들어오면 시장이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 반대의 가장 큰 이유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경우 소형차를 앞세워 이탈리아 시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고, 시보레 브랜드로 시판되는 GM대우의 마티스의 경우 합리적인 가격과 높은 연비를 앞세워 수입 소형차 판매 1위를 기록하면서 경쟁 차종인 피아트 판다와 친퀘첸토를 바짝 추격하는 상황이다.

피아트는 지난 7월 21일 회사를 승용차와 산업용 부문 등 2개 기업으로 분리하기로 하는 등 다양한 경영난 타개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안정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 시간 벌기가 목적 = 한-EU FTA 협정문에서는 한국산 자동차의 관세 철폐 기간을 중대형의 경우 3년, 소형차는 4년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이탈리아 정부는 중대형 4년, 소형차는 5년으로 늘릴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한국차가 사용하는 저가 부품의 사용 비율 규정을 더욱 강화하는 등의 보완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탈리아 정부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현실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협정문 자체의 변경보다는 시간 벌기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탈리아 현지 언론매체들 역시 자동차 산업 보호가 한-EU FTA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이며, 현실적으로 협정문 변경은 쉽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버는 것이 당장의 목표라는 분석 기사를 내놓고 있다.

오이파 매거진 인터넷 신문은 이탈리아 정부가 한-EU FTA를 거부하는 주된 이유로 자동차 산업을 꼽으면서, 지연작전을 통해 한-EU FTA 협정의 발효일을 2011년 1월에서 조금이라도 뒤로 늦추는 것이 이탈리아 정부의 전략이라고 보도했다.

이탈리아는 이날 EU 이사회에서 FTA 협정이 내년 6월 말 이후에 발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관계자들도 이 같은 고민과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프랑코 프라티니 이탈리아 외교부 장관은 "현재의 협정안은 이탈리아 자동차 업계가 극심한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큰 부담"이라고 말했고, 아돌포 우르소 경제발전부 차관은 "이번 협정은 전체적으로 볼 때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나, 자동차 시장이 입을 피해가 너무 큰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EU 회원국들이 FTA 조기 발효에 찬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가 마냥 고집을 부리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경제 일간지 일 솔레 24오레는 '고립된 이탈리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협정에서 이탈리아가 관심을 두는 것은 두 가지"라며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럽과 이탈리아의 자동차 시장에 들어올 한국차의 충격과 한국과 미국 사이의 FTA 비준 상황을 꼽았다.

이 기사에서 넬리 페로치 이탈리아 유럽 연합 대사는 "현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다른 나라들이 이탈리아를 강하게 압박하는 상황"이라며 "협정의 발효 기간을 연장하는 것은 어느 정도 유연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탈리아가 요구한 만큼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간지 일 조르날레 역시 소형 자동차 시장에 대한 개방 연기와 한국과 미국의 자유 무역협정 처리결과를 지켜보자는 것이 이탈리아 정부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 伊 국내정치도 원인 = 최근 오랜 정치적 동맹자와 결별하고 지지율 추락을 겪고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부의 위기도 이탈리아로 하여금 한-EU FTA에 제동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집권 자유국민당(PDL)을 함께 설립한 지안프랑코 피니 하원의장과 지난 7월 말 결별한 뒤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연거푸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고, 집권당의 지지율도 30%대로 떨어졌다.

부패와 섹스 스캔들, 연정 붕괴, 시칠리아 지역 교사 시위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탈리아 정부가 국민들의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지연전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제네바.로마연합뉴스) 맹찬형 특파원.전순섭 통신원 mangels@yna.co.krsoonsubrom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