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실향민의 슬픈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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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마다 집안엔 쓸쓸함 가득
'북녘서 잘살길' 마음속 위안
'북녘서 잘살길' 마음속 위안
명절을 앞둔 이맘 때가 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이었다. 일제 때부터 목재 관련 일을 하셨는데,해방 뒤 벌목을 하러 만주 용정(龍井) 산판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북한 관리한테서 앞으로는 개인적인 용도로 나무를 벨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월남을 결심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사회주의 교사를 지낸 할아버지 덕택에 그쪽으로 사전 지식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개인적 용도 운운하는 한마디에 오랜 삶의 터전을 버리고 기꺼이 타관살이를 결심,결행하셨다.
아버지는 독자라고 했다. 손아래 남동생이 있었는데 백일해 기침을 하다가 어려서 죽었고,역시 손아래 누이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같은 의사와 결혼했는데,셋째 아이를 낳다 그만 유명을 달리했다고 들었다. 그런 까닭에 독자 아닌 독자가 됐다고 한다.
남행을 결심한 아버지는 할머니를 먼저 서울로 내려 보내고 가산을 정리해 돈을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급작스레 돈을 만들기는 어려워서 그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고 한다. 곧 뒤따라 가겠노라는 약속이 한 달이나 어긋나자 서울 친척네 집에 혼자 내려와 연일 목이 빠지게 아들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고 속단하셨다. 생지옥에 살더라도 아들만 있으면 된다며 부득불 다시 삼팔선을 넘어가셨는데,그 사이 아버지는 비교적 감시가 소홀한 동해로 월남했다. 모자(母子)가 정말로 기가 막히게 길과 운명이 어긋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마치 비운의 신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삼팔선 경계가 강화돼 서로 오갈 수 없었다고 한다.
내 아버지와 할머니 모자의 잔인한 생이별은 그렇게 시작됐다.
"너희 할마이(할머니)레 생존해 계시면 올해 연세가 70이다. 김일성이가 인민들 배를 굶긴다고 하지만 기래도 아주 굶겨죽이기야 하겠니?"
"이 두부구이레 너희 할마이가 제일 좋아하셨지.우리 집 제사상엔 꼭 놓기요. "
그런 말씀 끝에도 갑자기 목소리가 이상해져서 돌아보면 아버지는 가만히 손에 수건을 쥐고 우셨다.
"너희 고모부도 의사였는데,사람이 원체 착해서리 할마이를 극진히 보살펴 드렸을 게다. "
죽은 전처의 장모를 재혼한 사위가 과연 잘 보살펴드렸을까. 하물며 전 인민이 다 헐벗고 굶주린다는데 아무리 의사라지만 그럴 여유가 있을까. 이런 의문들을 아버지는 한사코 외면하려는 듯했고,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북한이 제발 잘살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집 명절은 시끌시끌하고 풍요로운 명절이 아니라 늘 적막감이 감돌고 아버지가 우는 우울한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명절 돌아오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모자의 그 길고 잔인한 운명은 1983년,이산가족 찾기 열풍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그해 8월에 끝이 났다. 평생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할머니를 찾아서 끝난 게 아니라,같은 처지에 놓인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밤낮없이 펼치는 감격과 감동의 드라마를 보던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비운의 끝자락에서 자식인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맹세했다. 다시는 핏줄과 혈육의 노예로 살지 않겠노라고.정치적인 그 어떤 수사(修辭)에도 속지 않겠노라고.아버지가 남긴 이산과 분단의 유산은 보란듯이 모두 버리겠노라고!
그러고 다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명절 때만 돌아오면 까닭없이 울적해지는 이놈의 심사는 필경 분단의 슬픈 유전자 탓일 테지만,여전히 무슨 시혜나 베풀 듯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하는 요지부동의 북한을 보면서 두 번씩이나 남북한 당국자들이 모여 희희낙락하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김정산 < 소설가 >
아버지는 독자라고 했다. 손아래 남동생이 있었는데 백일해 기침을 하다가 어려서 죽었고,역시 손아래 누이는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같은 의사와 결혼했는데,셋째 아이를 낳다 그만 유명을 달리했다고 들었다. 그런 까닭에 독자 아닌 독자가 됐다고 한다.
남행을 결심한 아버지는 할머니를 먼저 서울로 내려 보내고 가산을 정리해 돈을 만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급작스레 돈을 만들기는 어려워서 그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고 한다. 곧 뒤따라 가겠노라는 약속이 한 달이나 어긋나자 서울 친척네 집에 혼자 내려와 연일 목이 빠지게 아들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고 속단하셨다. 생지옥에 살더라도 아들만 있으면 된다며 부득불 다시 삼팔선을 넘어가셨는데,그 사이 아버지는 비교적 감시가 소홀한 동해로 월남했다. 모자(母子)가 정말로 기가 막히게 길과 운명이 어긋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마치 비운의 신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삼팔선 경계가 강화돼 서로 오갈 수 없었다고 한다.
내 아버지와 할머니 모자의 잔인한 생이별은 그렇게 시작됐다.
"너희 할마이(할머니)레 생존해 계시면 올해 연세가 70이다. 김일성이가 인민들 배를 굶긴다고 하지만 기래도 아주 굶겨죽이기야 하겠니?"
"이 두부구이레 너희 할마이가 제일 좋아하셨지.우리 집 제사상엔 꼭 놓기요. "
그런 말씀 끝에도 갑자기 목소리가 이상해져서 돌아보면 아버지는 가만히 손에 수건을 쥐고 우셨다.
"너희 고모부도 의사였는데,사람이 원체 착해서리 할마이를 극진히 보살펴 드렸을 게다. "
죽은 전처의 장모를 재혼한 사위가 과연 잘 보살펴드렸을까. 하물며 전 인민이 다 헐벗고 굶주린다는데 아무리 의사라지만 그럴 여유가 있을까. 이런 의문들을 아버지는 한사코 외면하려는 듯했고,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북한이 제발 잘살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집 명절은 시끌시끌하고 풍요로운 명절이 아니라 늘 적막감이 감돌고 아버지가 우는 우울한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명절 돌아오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모자의 그 길고 잔인한 운명은 1983년,이산가족 찾기 열풍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그해 8월에 끝이 났다. 평생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할머니를 찾아서 끝난 게 아니라,같은 처지에 놓인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밤낮없이 펼치는 감격과 감동의 드라마를 보던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비운의 끝자락에서 자식인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맹세했다. 다시는 핏줄과 혈육의 노예로 살지 않겠노라고.정치적인 그 어떤 수사(修辭)에도 속지 않겠노라고.아버지가 남긴 이산과 분단의 유산은 보란듯이 모두 버리겠노라고!
그러고 다시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명절 때만 돌아오면 까닭없이 울적해지는 이놈의 심사는 필경 분단의 슬픈 유전자 탓일 테지만,여전히 무슨 시혜나 베풀 듯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하는 요지부동의 북한을 보면서 두 번씩이나 남북한 당국자들이 모여 희희낙락하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김정산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