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 12년(993년) 80만 거란군이 공격해오자 온 나라가 들끓었다. 조정에선 항복하자는 안과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안을 놓고 격론을 벌이다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이에 극력 반대하고 나선 이가 서희(942~998)다. 자진해서 국서를 갖고 적장 소손녕과 만나 담판을 벌인 끝에 거란을 철수시켰다.

거란이 협상에 나선 데는 까닭이 있었다.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거란은 중원을 지배하던 송나라와 대립관계였다. 고려를 침공한 것도 송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서희는 이 같은 판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마침 오랜 행군과 안융진에서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거란군에 철군의 명분을 제공하니 받아들일 수밖에.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혜안과 상대의 약점을 활용하는 외교력을 통해 자칫 평양 이남으로 쪼그라들 뻔했던 영토를 지켜낸 것이다.

조선 태종 · 세종 때 아전 출신 외교관 이예(1373~1445)의 활약도 대단하다. 1396년 울산에 일본 해적이 쳐들어와 군수를 사로잡아 가자 선뜻 이예가 나섰다. 해적선에 숨어들었다가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으나 그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군수와 함께 무사히 돌아왔다.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벼슬을 내렸다. 1401년 정식 외교사절로 처음 일본에 파견된 후 40여년간 40여 차례나 일본을 오가며 667명의 조선 포로를 귀환시켰고, 자전(自轉)물레방아 사탕수수 등을 들여왔다.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데다 한 번에 몇 달씩 걸리는 출장을 거의 매년 갔던 셈이다. 71세에 대마도행을 앞두고 세종이 건강을 걱정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젊어서부터 대마도에 드나든 신(臣)이 가야 저들이 사실을 숨기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게 노구를 이끌고 포로 7명을 데려옴으로써 마지막 임무를 마쳤다.

특채 파문으로 장관이 물러난 데 이어 강도 높은 감사를 받고 있는 외교통상부의 분위기가 말이 아닌 모양이다. 이달 말 유엔총회,11월 G20정상회의 같은 큰 행사를 앞둔 건 물론 급변하는 남북관계 등 주변 정세에 대처하기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특혜의 뿌리는 도려내는 게 당연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헌신하고 있을 서희 · 이예 같은 외교관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참에 불공정한 부분은 확실하게 바로잡되 외교통상의 전문성은 더 강화해야 할 일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