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에 채권은행 협의회는 '공포' 그 자체다. 재무구조개선 대상에 한번 오르면 은행들이 공동으로 신규 여신을 중단하고,만기 여신도 가차없이 회수했다. 외환 위기 이후 이런 관행은 중단 없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17일 이 같은 관행에 일단 제동이 걸렸다.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지 않는다는 이유로 은행들이 만기여신 회수 등 공동 행동에 나선 것이 위법이라며 현대그룹이 지난달 10일 낸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다.



◆은행 공동 제재 관행에 제동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는 이날 결정문에서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과 기타 채권은행들이 공동으로 현대그룹에 가한 금융제재는 근거 규정을 찾을 수 없는 과도한 규제"라며 금융제재의 효력 상실을 결정했다. 현대그룹은 채권은행들이 취한 신규 여신 중단과 만기 여신 회수 등의 금융제재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크게 반겼다. 그룹 관계자는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 등이 올해 어닝 서프라이즈 수준의 실적을 기록했음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신인도가 추락했다"며 "걸림돌이 해소된 만큼 현대건설 인수 전략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 공동 제재를 주도해온 현대그룹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법원 결정이 알려지자 긴급 회의를 열어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채권은행 협의회를 이른 시일 안에 열고 대처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며 "불복 절차를 진행할지 여부도 그때가서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기업 임원인 A씨는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에 대한 제재 조치를 취하면서 은행은 채권단 협의회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며 "법원이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단한 만큼 앞으로 이 같은 관행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현대그룹이 가처분 신청을 내자 외환은행은 "채권은행이 모여서 제재를 논의하는 것은 지금까지 해 온 관례"라며 "왜 현대그룹만 문제 삼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해 왔다.

◆현대그룹,유리한 고지 차지했다

이번 결정으로 재무구조개선 약정 체결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현대그룹과 외환은행 간 대결이 새 국면을 맞게 됐다. 외환은행으로선 현대그룹을 압박할 수단을 사실상 잃어버리게 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초 현대그룹은 지난 5월 말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어야 했으나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던 작년을 기준으로 약정을 맺도록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수차례 약정 체결을 미뤘다. 올 연말에 갚아도 될 외환은행 대출금 750억원을 조기에 상환하며 주채권은행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이 강경하게 나오자 외환은행은 지난 8월 말 채권은행단 공동 명의로 신규 여신 중단 및 만기 여신 회수라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법원이 현대그룹의 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현대그룹의 당면한 문제들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업계에서 나온다. 은행들이 불복 절차를 밟을 경우 지루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데다 채권은행단의 공동 제재가 위법이라는 법적 판단이 최종적으로 결론나더라도 이것이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지 않아도 되는 근거일 수는 없다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채권단,결과는 마찬가지일 것

채권은행단이 법원의 결정을 순순히 들을지도 의문으로 지적된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이번 법원 판결은 은행의 공동 행동에 대한 것일 뿐 각각의 은행들이 개별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라며 "어떻게 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현대그룹의 채권은행은 외환은행을 비롯해 신한,농협,산업은행 4곳이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외환은행이 강경론을 주도했을 뿐 나머지 채권은행단은 의견이 분분하다"고 반박했다.

채권단은 재무구조개선 약정에 대해서도 은행감독시행세칙을 정비하면 시행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 관계자는 "법원이 재무구조개선약정제도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므로 관련 규정을 정비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 규정을 정비해 현대그룹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는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채권단이 현대그룹을 상대로 약정체결을 강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재판부는 "경영이 악화됐을 때 어떤 식으로 이를 극복할지는 원칙적으로 기업이 자유롭게 결정할 사항"이라며 "기업이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체결하지 않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그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박동휘/이태훈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