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비용 3000조원 육박, 獨 GDP의 4%…당초 예상 상회
동·서독지역 실업률 2배 차이…작센 등 동독 도시 활기 잃어
동독 출신 총리 이후 변화 조짐 "통일 자체는 긍정적" 평가 늘어
지난 14일 오후 중부 유럽의 교통 요충지인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앙역.퇴근 시간을 맞아 ICE 고속열차에 승객들이 바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옛 서독 지역인 쾰른,뒤셀도르프,뮌헨 등으로 향하는 열차엔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엘리트 회사원들로 가득했다. 열차를 타자마자 그들은 각자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꺼내들고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반면 옛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드레스덴 등으로 향하는 열차 안엔 남루한 옷차림을 한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나이 많은 노인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동독행 열차 탑승객들은 의자에 앉자마자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역에서 만난 현지 언론인 데틀레프 포크트씨(45)는 "옛 동독인과 서독인은 옷차림만 봐도 구별할 수 있다"며 "서독 지역으로 향하는 ICE 열차 안에선 회사원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동독에선 그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음 달 3일은 독일이 통일된 지 20년이 되는 날이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11개월 뒤 독일은 전 세계에 통일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평가다. 무엇보다 동서독 간 경제 격차로 인한 갈등은 독일이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다. 독일 시사 주간 슈피겔은 "동독인들이 통일 이후 서독과의 경제력 차이로 인해 '과거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오스탈기(ostalgie)에 젖어 있다"고 보도했다.
◆동독인,"우리는 독일인 아닌 2류 국민"
옛 서독 지역의 대표적 산업도시인 뒤셀도르프.오후 5시 무렵 화학 기업들과 통신사,언론사 건물이 몰려 있는 시내 중심가는 퇴근하는 회사원들로 붐볐다. 도로도 여기저기 심한 정체가 벌어졌다. 반면 다음 날 같은 시간 동독 지역의 대표적 도시인 작센주 라이프치히 시내에선 한가로이 새에게 먹이를 주는 노인들만 볼 수 있었다. 광장을 구경하는 관광객들만 활기차 보였다. 독일에서 20년간 관광 가이드로 일한 한국인 이모씨(40)는 "1990년대 중반에 비해선 다소 나아졌지만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곤 동독 지역 거리는 낮에도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어 을씨년스러운 곳이 많다"고 전했다.
통일된 지 20년이 흘렀지만 동서독 간 경제 격차는 여전하다. 서독 지역의 실업률이 6%에 머물고 있는 데 비해 동독 지역은 13%가 넘는다.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면 실업률은 20%까지 치솟는다. 통일 당시 실시됐던 동서독 화폐의 1 대 1 통합에 따라 동독의 화폐가치가 절상되면서 이 지역 기업들의 경쟁력은 급속도로 상실됐다. 많은 동독 기업들이 도산했고 대량의 실업자가 양산됐다. 동독 지역이 경제 동력을 상실하면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구 유출이 시작됐다. 1990년을 전후해 동독 지역의 총 인구는 1810만명에 육박했지만 현재는 1650만명으로 10% 급감했다. 대규모 인구 유출은 다시 경제성장 둔화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동독 지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8년 기준으로 서독의 70% 수준에 불과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뒤셀도르프까지 이어지는 구간에선 열차 차창 밖으로 공장들과 기업 간판이 약 1분마다 눈에 띈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에서 라이프치히까지 가는 구간엔 온통 시골마을 풍경만 펼쳐질 뿐이다. 공장이라곤 눈뜨고 찾아보기 힘들다. 슈피겔 조사에 따르면 동독인들의 절반 이상이 통일 전 삶의 질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동독 주민들의 80% 이상은 자신들을 2류 국민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심지어 60%의 동독인들이 자신들을 독일 국민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서독인,"동독인은 게으르고 멍청해"
통일 이후 독일에선 베시(wessi)와 오시(ossi)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독일어로 서쪽과 동쪽을 뜻하는 베스트(west)와 오스트(ost)에서 유래된 이들 용어는 모두 비하적인 표현이다. '거들먹거리는 서독놈'을 의미하는 베시는 동독인들이 서독인들을 빗대 부르는 말이다. 반면 서독인들은 동독인들을 '게으르고 멍청한 동독놈'이라는 뜻의 오시로 부른다.
통일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독일 정부의 추산에 따르면 통일 이후 지난해까지 소요된 총비용은 2조유로(약 3000조원)에 육박한다. 연간 지출 규모는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4% 수준이다. 통일 당시 예상했던 GDP의 1.5% 수준을 훨씬 웃도는 수치다. 정부는 막대한 통일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1991년부터 서독 주민들에게 1인당 소득의 7.5%에 달하는 통일세(연대세)를 부과했다. 통일세는 1993년에 한시적으로 폐지된 후 1995년부터 다소 낮아진 5.5%의 세율로 부활했다. 통일세로 거둬들인 돈의 절반은 동독 주민들의 연금이나 실업급여 등 사회보장성 지출에 쓰였다. 인프라 재건에 쓰인 비용은 13%에 불과했다.
이 같은 통일세를 놓고 서독인들의 불만이 높다. 자신들이 낸 세금이 동독인들을 먹여 살리는 데 쓰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서독 주민들의 76%가 통일세가 하루빨리 폐지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앞으로 갈등 해소될 가능성은 많아
통일에 대한 불만과 갈등은 여전하지만 통일 자체에 대해선 동서독인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23일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동독인의 57%가 통일이 필요했다고 답했다. 서독인도 52%가 긍정적으로 응답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30대 회사원 안나 제츨러씨는 "동서독 지역 갈등은 분단 시절을 경험했던 기성세대에 국한된 얘기"라며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들은 그런 지역 갈등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통일된 지 15년이 흐른 2005년엔 동독 출신의 앙겔라 메르켈이 총리로 당선됐다. 같은 시기 사회민주당(SPD) 당수였던 마티아스 플라체크 역시 동독 출신이다. 점차 동서독 간 갈등이 완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프랑크푸르트/뒤셀도르프/라이프치히=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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