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닷컴] 독일 최대 전자기기 업체인 지멘스 노사가 최근 직원들의 고용을 평생 보장키로 합의해 관심을 끌고 있다.지멘스는 독일에서만 12만8000명을 고용하고 있고 이들 모두에게 종신고용을 보장키로 했다는 소식이다.임금 동결과 고용보장의 맞교환은 기업이 경영 타개의 일환으로 쓰는 협상 전략으로 전형적인 양보 협상 모델로 꼽힌다.하지만 유럽 노사현장에서 종신고용을 보장하는 사례는 드문 일이어서 이번 합의는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 종신고용보장 왜 나왔나

지멘스 노사협상이 타될된 뒤 종신고용이 경영에 큰 부담을 줄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쾰른경제연구소는 “경제적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노조가 해고 위험이 없는 것을 무기로 임금 인상을 무작정 요구하면 회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지멘스는 왜 종신고용을 보장했을까.임금인상 억제를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페터 뢰 셔 지멘스 최고경영자(CEO)는 “경영환경이 허락하는 한 독일 내 지멘스 근로자들을 해고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이 다짐에는 ‘경영환경이 허락하는 한’이란 단서가 붙어있다.경영환경이 악화되면 종신고용은 지켜지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어떻게 보면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하기 위해 고용보장을 약속한 것으로 해석된다.AP통신도 “지멘스의 일자리 보장은 임금 인상폭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독일 최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IG메탈)은 몇년 사이 최고 요구율인 6%의 임금인상안을 지멘스 측에 제시했었다.노조의 이러한 요구는 독일의 경제성장과 무관치 않다.독일의 지난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1분기 보다 2.2% 증가해 1991년 통일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연율로 환산하면 9%에 달한다.실업률도 14개월 연속 하락해 1992년 이후 최저인 7.6% 수준까지 떨어졌다.독일 금속노사는 지난해 2.0% 임금 인상과 350유로의 일시 보너스 지급안에 합의했다.

유럽연합(EU) 평균에 못 미치는 낮은 평균 임금상승률도 노조의 고율 임금인상 요구에 힘을 실어주었다.독일 민간부문 노동자 임금은 2000년 초부터 올 1분기까지 총 21.8% 상승했다.EU 평균 35.5%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이러다보니 독일 정부도 금속노조가 높은 임금인상률을 받아내야 한다고 지지했을 정도다.노조로서도 올해 무언가 더 많음 임금을 받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왔고 결국 파업까지 단행했다.하지만 금속노조는 회사측의 어려운 경영사정을 감안,고통분담 차원에서 임금동결을 받아들였고 대신 회사측으로 부터 종신고용이란 화답을 받아냈다.

◆종신고용제,善인가 惡인가

지멘스 노사는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한발짝씩 양보하는 지혜를 발휘해 이를 극복하고 있다.지난 2003년 겨울에도 지멘스 노사는 지금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지만 상생의 합의를 통해 경영난 타개에 나선 경험이 있다.지멘스는 이때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조에 임금인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을 제안했다.근로시간을 주당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늘리자는 것이었다.그해 봄 우리나라에서는 노동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근로시간 단축(주당 44시간에서 40시간)을 하되 임금삭감은 한푼도 안되도록 근로기준법에 명시했다.그런데 IG메탈은 근로시간이 늘어났는데도 임금인상은 안된다는 회사측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물론 지멘스 노조가 순순히 회사측 요구에 응한 것은 아니었다.처음엔 노조가 절대 받아들일수 없다고 버텼다.노조의 반대가 지속되자 회사측은 인건비가 싸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헝가리로 휴대폰 공장을 옮기겠다고 으름짱을 놓았다.지멘스는 헝가리에 공장부지까지 마려해 놓은 상태였다.노조 지도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회사측 요구를 거절하자니 조합원들이 일자리를 몽땅 잃어버릴 것 같고,수용하자니 조합원들로 부터 거센 비난에 직면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마냥 머뭇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조합원 투표를 통해 임금인상 없는 근로시간 연장을 선택했다.노조는 그 댓가로 고용안정을 보장받을수 있었다.이 같은 지멘스의 협상 결과는 금속산별노조의 ‘패턴교섭’(산별교섭에 가이드라인으로 삼을 수 있도록 대기업 노사가 미리 벌이는 협상)으로 작용해 2004년 2월 독일 전체 금속노사 협상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타결됐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은 지멘스의 종신고용 합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 종신고용 약속은 물거품이 될수 있다.우리나라에서도 현대·기아자동차를 비롯한 많은 사업장 노사가 임·단협을 체결할 때 고용보장을 약속하지만 경영이 어려워지면 이러한 약속은 지켜질수 없게 된다.그래서 고용보장 약속은 구색맞추기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많다.

그럼에도 종신고용에 대해 독일 재계가 바짝 긴장하는 것은 고용보장과는 의미가 다르기때문이다.경영난에 처했을 때 회사 측은 고용조정을 생각하기 보다는 근로시간 단축,배치전환,순환휴직,근로시간계좌제 등 유연 근무제와 임금삭감을 통해 근로자의 고용유지를 최대한 보장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있다.다시말해 종신고용은 노조원들의 고용불안을 없애고 회사에 대한 근로자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특효약이다.하지만 자칫 기업운영에 골치덩어리로 작용해 생산성과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기에 많은 기업들이 섣불리 도입하지 하지 않는 것이다.일본 기업들이 최근들어 종신고용제를 잇따라 거둬들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