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헌 위스콘신밀워키대 명예교수(79)는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석학이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1700년 이후 1996년까지 세계 석학 인물을 선정해 만든 '경제학 석학 인명록(Who's who in the world)'에 올라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다. 애덤 스미스,존 케인스,데이비드 리카도,밀튼 프리드먼과 함께 경제 석학으로 꼽힐 수 있었던 것은 이 교수의 논문이 경제학자들 사이에 그만큼 많이 인용된 데 따른 것이다.

이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이 제시한 상생 문제는 국가 경쟁력을 갖추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평가하면서도 "그래도 정부가 대기업을 직접 야단치지 말고 시장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실질적인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가 직접 상생을 이끌어내려고 나서면 시장 개입으로 비쳐져 외국 투자자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우리나라가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선 기업가 정신을 살리고 혁신과 벤처 투자를 유도하는 정책을 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지난 24일 시카고 자택에서 이 교수를 만나 한국 경제의 경쟁력 강화방안을 들어 봤다.

▼세계 경제 성장세가 급격히 꺾이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미국 경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습니까.

"미국은 1조달러 규모의 경기 부양 정책을 썼지만 실업률을 낮추는 데 실패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당초 그 정도 부양책이면 연말께 실업률이 8%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잘못된 전망이었다는 게 드러났지요. 최근 주택시장 및 소비자 신뢰지수 등 경제 지표들이 꺾이면서 더블딥(경기 반짝 회복 뒤 재하강)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더블딥까지 가진 않겠지만 미국 실업률이 완전고용 수준인 5% 정도로 떨어지려면 4~5년 정도 걸릴 겁니다. 통상 1~2년 정도 지나면 극복됐던 경기 침체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죠."

▼미국이 경제 문제를 쉽게 풀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불확실성이 너무 많아요. 의료보험 개혁이나 탄소배출권시장(cap and trade) 도입으로 기업들의 부담이 얼마나 커질지 알 수 없습니다. 조지 W 부시 정부 때 도입한 세금 감면 혜택이 연말에 끝나면 고소득층의 세금 부담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중산층 세율을 낮춰주기 위해 고소득층에 더 많이 세금을 내도록 하면 전체 소득의 절반가량을 세금으로 내 온 부자들의 세율이 60~70% 수준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돈 버는 중소기업들과 고소득자들이 해외로 떠나는 등 자본 유출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정책 리스크에 대한 우려를 가라앉히려면 실질적인 성장 정책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

▼한국 경제가 처한 위험은 무엇입니까.

"하반기 들어 세계 경제가 성장 동력을 잃어가고 있지만 한국 경제가 후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극동아시아지역 국가의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 지원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따지면 미국보다 많았고,더욱 뚜렷한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가계가 빚을 줄이기 위한 디레버리지(deleverage)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부가 현금을 나눠 줘도 소비가 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이들 지역 국가는 가계 빚이 상대적으로 적은 덕분에 정책 효과를 보게 된 겁니다.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확대정책으로 소비가 증가했고,수출을 통해 경기 회복 효과를 먼저 누리고 있다고 분석할 수 있죠."

▼미국도 고용이 심각한 문제지만 한국도 일자리를 창출해야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할텐데요.

"우선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법인세율을 낮춰야 합니다. 한국 법인세는 22%(지방세를 포함하면 24.2%)로 대만(20%) 홍콩(16.5%) 싱가포르(17%)보다 높습니다. 특히 전체 고용의 87%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에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세 감면 혜택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중 90%를 정부가 보증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장비 등을 구매할 때 지원하고 있죠.한국도 비슷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현금 결제를 하지 않는 대기업들로 하여금 납품을 받으면 어음지급보증을 서도록 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정부가 직접 나서서 대기업에 압력을 넣을 게 아니라,시장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돼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덜어주는 효과를 가져올 겁니다. "

▼경제학자로서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 제언을 하신다면.

"경제 발전과정이론에 따르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선 △기업가 정신 △기술혁신 △벤처투자가 살아나야 합니다. 한국은 교육열이 높아 고졸자의 80%가 대학에 가려고 합니다. 이런 인적자원을 초기 단계부터 잘 교육시키면 부(富)를 창출할 수 있는 잠재적인 기업가로 양성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좋은 사례입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92년 외국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기 위해 1억달러를 출연해 야즈마 펀드(Yazma Fund)를 만들었습니다. 외국 자본들로 하여금 무엇에 투자할지를 정하도록 하고,필요 자본의 상당부분을 대줬습니다. 외국자본이 몰려들었고 첨단 기술업체들이 잇따라 설립됐습니다. 국내 자본가들은 외국 투자 파트너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고요. 인구 700만명의 이스라엘이 프랑스와 독일을 합친 것만큼 벤처 투자를 유치해 제2의 실리콘 밸리를 만드는 것에 정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죠."

▼남유럽 국가 재정위기가 불거지면서 주요국의 국가 채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재정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길게 보면 한국 정부도 각종 연기금,의료보험 등 사회보장 지출 부담이 커지게 됩니다. 출산율이 떨어지는 데 반해 고령자 비중은 높아지고 있습니다. 천연자원이 부족하고 만성적인 자본 부족 현상을 고려하면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철저히 시장친화적인 경제 정책을 펴야 합니다. "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과 같은 큰 고래 사이에 낀 새우의 형국인 한국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어떤 노력이 뒤따라야 할까요.

"세계 성장 엔진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과 인접해 있다는 점을 활용해 전자부품,화학소재 등 부품 소재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첨단 부품소재 분야에서 일본이 앞서 있지만 최근 들어 한국도 일본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유의할 점은 일본이 통화 · 재정 정책을 통해 언젠가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할 것입니다. 때문에 한국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경쟁력 있는 부품소재 관련 기업을 더 많이 키워야 합니다.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들이 더 많이 나오는 것 외에는 경쟁력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금융시스템을 강화해야 하는 과제도 있는데요.

"한국이 미국의 금융규제 개혁을 그대로 따라갈 이유는 없습니다. 미국은 거품을 야기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패니메이와 프레디맥 등 국책모기지 회사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마련하지 않은 채 지나치게 많은 규제를 담은 금융개혁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또 다른 금융 위기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규제가 많으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11월 서울에서 열립니다. 의미 있는 회의가 되려면 무엇을 논의하고 어떤 합의를 이뤄내야 할까요.

"그동안 G20에서 논의했던 약속들을 이행할 방법을 이끌어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의장국인 한국은 개발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한 세계 금융안전망을 강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G20 정상회의가 열리기 직전 세계 최고경영인(CEO)들을 초대해 '기업인 정상회의'를 갖기로 한 것도 아주 좋은 발상입니다. 모임의 성격상 무역과 투자 문제를 논의하게 될 테고,한국 경영자들은 미국쪽 파트너들에게 미 의회에 의해 2년 동안 막혀 있는 한 · 미FTA 비준을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봅니다. "

/시카고=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


◆ 이동헌 교수는

충남 홍성 출신으로 국가 대표 농구선수로 활동하다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던 1950년대 초반 태극마크를 달고 해외에서 시합하며 한국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경제학 석 · 박사 학위를 딴 뒤 테네시대(1962~1967년)와 위스콘신밀워키대(1967~1997년)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이후 국내 아주대(1997~2003년) 석좌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더 어메리칸 이코노믹 리뷰' 등 권위 있는 학술지에 계량경제와 화폐 및 금융 관련 논문 48편을 실어 권위를 인정받았다. 특히 시카고학파의 대부인 밀턴 프리드먼의 합리적 기대 가설을 검증하는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하며 시카고대에 자신의 논문을 게재해 줄 것을 요구한 경력도 있다. 당시 논문은 결국 '저널 오브 파이낸스'에 실렸다. 1960년대 파생 상품 등을 유동성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도 냈다. 국내 학계에도 단순 산술 평가가 아닌 '체감물가'라고 부를 수 있는 실질생활물가지수를 개발하도록 유도했다. 주요 저서로는 '지역간 플로 연구(1973년)','토빈과의 대화(1983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