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의학계에서 치료의학으로서 한의학의 위상을 되찾자는 바람이 불고 있다.

동의보감과 사상체질이 우리 고유의 한의학을 대변하고 있으나 자칫 보약 위주의 양생(예방의학)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치료개념이 추상적 · 의념적인 측면에 치우친 감이 있다는 것.따라서 실질적인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실증성에 중점을 둔 한의학으로 거듭나도록 해야 한다는 게 일부 한의사들의 견해다.

이에 따라 상한론에 입각한 고대 한의학의 원류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상한론(傷寒論)은 중국의학에서 약물요법의 집대성자라고 지목되는 후한(後漢)의 장중경(張仲景)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협의의 상한은 외부의 사기(邪氣)에 감촉돼 생기는 급성 열성 질환을 일컫는다. 나머지는 잡병(雜病)으로 다뤘다. 하지만 광의의 상한은 인체 안팎에 사기가 침입해 생기는 모든 병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3세기 말에 서진(西晉)의 태의령(太醫令)을 지낸 왕숙화(王叔和)가 상한과 잡병의 치료법을 아우르는 상한론을 새로 정리한 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왕숙화는 단편적 이론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의미를 왜곡하고 새로운 의미를 임의로 추가함으로써 편작 화타 장중경을 거쳐 형성된 고대 중국 한의학의 진면목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상한론은 본래 육경(태양,양명,소양,태음,소음,궐음)에 따라 질병을 분류하며 질환 단계별로 맥(脈)을 분별하고 증후를 살핀 다음 그에 맞게 처방을 조절하는 게 핵심이다.

후세에 육경변증 이론(태양증은 수극화,양명증은 화극금,소양증은 금극목,태음증은 목극토,소음증은 토극수,궐음증은 전반적인 음기 고갈에 의해 나타남)이 등장해 추상적 개념으로 병증을 구분하는 방향으로 변질됐으나 본래 상한론은 다분히 실증주의 증거주의에 입각한 경험과학이었다는 게 옹호론자들의 주장이다. 즉 수많은 인체실험을 통해 효과가 입증된 처방이 기록 · 계승돼왔고,질병을 일으키는 독을 풀고 증상을 다스리는 데 초점을 둔 게 상한론이라는 설명이다.

상한론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한의사들을 고방파(古方波)라고 하며 이와 달리 음양오행의 균형을 중시해 이 균형이 깨질 때 병이 생긴다고 보는 한의사들을 후세방파(後世方派)라 한다. 후세방은 상한론이 금원사대가,명나라 의가를 거치며 변형돼 재창조된 한의학이라 볼 수 있다.

동의보감은 후세방 의학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한의서로 일본 한의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허준은 1610년(광해군 2년)에 조선의 의서인 의방유취와 향약집성방,중국의서인 본초강목 등 총 86종의 의서와 민간요법을 참고해 25권짜리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동의보감은 편저자가 직접 기술한 내용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인용문인 게 한계다. 실용성을 중요시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로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한다는 '양생'의 개념을 적극 제시하고 있다.

사상의학은 이제마가 고종 30년(1893년)에 저술에 들어가 이듬해 완성한 동의수세보원에 의해 제창됐다. 이제마는 이 책에서 사람을 4가지 체질(사상:태양 소양 소음 태음)로 나누고 모든 사람은 이 중 어느 한 가지에 속하므로 같은 질병이라도 체질에 따라 예방과 치료법을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질별로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강조한 것도 눈에 띈다. 구한말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살아간 유학자의 독창적 성찰이 높은 평가를 받긴 하지만 그 시각이 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옛 의학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데다 일관성과 검증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는 게 일부 한의학계와 중국 유학파 한의사들의 비판이다.

고방파 의학의 재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노영범 부천한의원 원장은 "후세방 의학은 실증성에 있어 신뢰도가 떨어지고 임상 현장에서 치료율도 30% 안팎에 불과하지만 고방파 의학은 경험과학의 하나로 실증성이 높고 치료율도 50%를 웃돈다"고 강조했다. 노 원장은 "우리 고유 한의학이 양생을 강조하고 허(虛)를 보하는 것을 중요시하다 보니 보약을 선호하게 만들었다"며 "약재의 정교한 사용으로 한의학을 치료의학으로 회귀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후세방은 한 처방에 들어가는 약재의 가짓수가 많아 개별 약재의 특징이 약화되고 중병일수록 치료효과가 미미한 반면 고방은 약물 가짓수가 적어 개별 약물의 효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궁극적으로 치료효과가 높아진다고 그는 덧붙였다. 아울러 진단에서도 진맥이나 사상체질 감별보다는 고방의 복진(腹診)을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복진은 복부의 긴장도,복부의 색깔,복피의 두께와 복부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징후를 종합적으로 파악,만병을 일으키는 일독(一毒)을 찾아내는 것으로 주관적인 진맥에 비해 훨씬 객관적이라고 설명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