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 매니지먼트] 인물 탐구-LG전자 사령탑 취임 앞둔 구본준 부회장
"자꾸 경쟁사가 사람을 빼 가려고 하잖아.한 명이라도 데려가면 특허침해 소송도 내고 가만 안 있을 거야.대만업체들이 힘 합치는 것을 걱정하는데 (대만은) 기술력에서 못 따라와.올해 우리가 1100만개를 생산하는데 내년에는 2200만개로 생산량을 늘려 1등 할 거야."

2002년 11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공항.여행가방 2개를 직접 들고 인천행 KLM 비행기에 오른 구본준 당시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 사장(59)은 우연히 기내에서 한국 기자들과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와인이나 한잔 하자"며 비즈니스석 뒷자리로 나온 그는 위스키까지 곁들이며 장장 6시간가량 얘기를 쏟아냈다. 경쟁사 전략을 거침없이 비판하고 액정표시장치(LCD) 분야에서 곧 세계 1등에 오를 것이라는 자신감도 드러냈다. 화제는 정치 분야로 이어졌다. 외환위기 때 LG반도체 사장으로 회사를 매각해야 했던 일을 떠올리며 정부 정책에 대한 야속함도 숨기지 않았다.

내달 1일부터 LG전자의 새 사령탑을 맡는 구본준 부회장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해외 출장 뒤 귀국길의 피곤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침없이 쏟아놓는 게 그의 화법이다. 그에게 늘 '직선적'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스마트폰 전략 실패로 부진을 겪고 있는 LG전자의 구원투수로 구 부회장이 낙점된 것도 특유의 공격적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인화를 중시하는 LG그룹 문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용장(勇將) 스타일이다. 한번 붙은 싸움에서 좀처럼 물러서는 일이 없는 '전투형'이다.

그룹 계열사 가운데 '1등 LG'를 가장 먼저 강조한 것도 그였다. LG디스플레이 사장 시절 회사의 공식 인사말을 '1등 합시다'로 바꾸고 전 임직원의 명함에 'No.1 Members,No.1 Company(1등 직원,1등 회사)'라는 슬로건을 새겨 넣도록 했다. 외환위기 이후 LCD 시장 전망이 불투명할 때도 과감하게 세계 최초로 4,5,6,7세대 LCD 투자를 결정,끝내 삼성을 제치고 1등에 오르기도 했다.

직선적이고 불 같은 표현 방식 때문에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곧잘 곤욕을 치른다. 해외 수주에 실패한 한 임원이 "다음에 잘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가 날벼락이 떨어졌다. 구 부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 바로 '다음에 잘하겠다'는 것이라 에두르는 표현보다는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그 뒤로 LG디스플레이 부하 직원들 사이에서 그 표현은 '금기'가 됐다.

◆그룹 최고의 전자 전문가

구본무 LG 회장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오너 경영인으로 불리지만,그는 그룹 내에서 둘째라고 하면 서운해할 정도의 전자 전문가로 꼽힌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나와 미국 시카고대에서 MBA(경영학석사)를 땄으며,이공계 출신답게 숫자에 밝다. 새로 공장을 세울 때면 배치도를 훤히 꿰고 다닌다. LG의 한 임원은 "부품 이동 경로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이라 자기 부품 생산밖에 모르던 당시 공장장들이 혼나는 일이 많았다"고 말했다.

시카고대에서 MBA를 받은 뒤에는 현지 통신 · 장비 회사인 AT&T에 입사해 팀장급까지 지냈다. 국내에 와서는 1987~1995년 LG전자에서 근무했고,LG반도체와 LG디스플레이 등을 거치며 25년간 전자산업에 몸담아 왔다. 유학과 해외지사 경험을 쌓으며 영어,중국,일어에 능통하게 된 것도 그의 장점이다. 아직도 일본 기술 자문 등 전자업계 리더들과 직접 만나 업계 동향에 대해 정보를 교류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 후임인 권영수 사장에게도 많은 인맥을 소개해줬다는 후문이다.

구 부회장은 중국과 서양 역사,문화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행사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현지 가이드의 어설픈 문화재 설명을 듣던 그가 직접 안내자로 나서 중국어를 섞어가며 해설하자 당시 동행한 부회장단이 감탄한 일도 있었다.

박학다식한 지식을 바탕으로 비유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지만 이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2004년 11월 연세대 강연에서 "LG디스플레이가 하는 LCD와 LG전자가 미는 PDP 중 앞으로 어느 것이 살아남겠느냐"는 학생의 질문에 "LCD가 로마 군단이라면 PDP는 퇴각하는 바바리안"이라고 말해 그룹 계열사인 LG전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샤프한 외모…서민적인 입맛

구 부회장은 옆으로 단추 두 개가 달린 '더블슈트'를 즐겨 입고 머리에는 포마드를 직접 발라 정갈하게 넘기는 걸 좋아한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다소 차가운 느낌을 받게 되는 이유는 이런 깔끔한 외모 때문이다. 하지만 털털하고 구수한 면모도 많다. 그의 단골집은 마포의 한 옻닭집이고,해장으로는 곰치탕을 즐겨 먹는다. 자동차도 법인 차량 대신 오래된 초록색 번호판이 달린 자가 차량을 아직도 사용한다.

직원들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임원들 상가를 찾을 때면 한두 시간 이상 빈소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상주를 위로한다. LG상사 대표 시절 한 계열사 임원의 상가에 들렀다가 빈소가 한산한 것을 보고는 직원들에게 전화를 돌려 사람을 모으고 자신도 밤새 자리를 지켰다. 강한 카리스마와 세심한 배려를 겸비한 '보스 기질' 덕분에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가장 좋아하는 운동은 야구다. 야구명문 경남중 출신인 그는 중 · 고교 시절 기수별 야구팀에서 선수로 뛰었고,최근까지도 동호회 경기에 나갔다. 2008년 LG트윈스 구단주를 맡은 후에는 일본 전지훈련 캠프장을 꼬박꼬박 찾고 있다. 바로 위 형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도 사회인 야구에서 내야수로 활동하는 등 구씨 일가의 '야구 사랑'은 '마니아급'이다. LG 관계자는 "골프도 가끔 즐기는데 한번 나가면 드라이버 거리에서 지는 것을 싫어하는 스타일"이라며 "운동,어학 모두 그가 '조금 한다'고 하면 '꽤 한다'고 이해해야 할 정도로 열정적인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구 부회장은 지난 추석 연휴에도 임원들의 보고를 직접 챙기며 LG전자의 새 미래를 구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LG그룹 주력사의 총수가 된 기쁨보다는 위기에서 회사를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에겐 훨씬 크다. LG전자가 현재 처한 위기의 양상은 결코 녹록지 않다.

세계 정보기술(IT) 시장의 거대한 흐름인 스마트폰 경쟁에서 뒤떨어진 것이 LG전자를 난국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그 위기는 소프트웨어에 약한 국내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LG뿐만 아니라 국내외 산업계 관계자들이 '구본준 웨이'에 주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