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명저(名著)는 실패와 고난의 산물이라고 하거니와 다산의 방대한 저작 역시 오랜 귀양생활(1801~1818)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500여권의 저서에 나타난 그의 학문과 관심의 폭은 인문 · 행정에서 기술 · 경영까지 실로 넓다.
수많은 글 중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를 꼽는 건 다산의 학문적 소양뿐만 아니라 인간적 면모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편지는 신유교옥에 연루돼 유배된 40세 때부터 풀려난 57세 때까지 두 아들 학유와 학연 및 둘째형(정약전)과 제자들에게 보낸 것이다.
하도 시시콜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대목이 많아 뛰어난 아버지를 둔 아들들이 힘들었겠구나 싶지만 자식 걱정하는 간절한 마음은 읽을 때마다 부모 심정이란 다 이런 것인가 싶어 눈물짓게 만든다.
그는 아들들에게 죄인의 자식이라 해서 기죽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신신당부한다. "누누이 말하듯 폐족이 되어 세련된 교양이 없으면 가증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아무쪼록 분발하여 실낱같이 된 우리 집안의 글하는 전통을 더욱 키우고 번창하게 해보아라." 그는 또 어디서든 과일과 채소,약초를 재배하라고 말한다.
"생지황 끼무릇 도라지 천궁 같은 것이나 쪽나무 꼭두서니 등에도 마음을 기울여 잘 가꿔보도록 하여라.남새(야채)밭을 가꾸자면 땅을 반반하게 고르고 이랑을 바르게 하는 일이 중요하며 흙은 가늘게 부수고 깊이 갈아 분가루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씨는 항상 고르게 뿌려야 하고 모종은 아주 성기게 해야 한다. "
난폭하고 거만한 것,어긋난 것을 멀리하라고 강조하는 한편 '양계를 해도 사대부답게'하라고 이른다. "양계에도 품위 있는 것과 비천한 것의 차이가 있다. 농서를 잘 읽고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보아라.색깔을 나누어 길러보고 앉는 홰도 달리 만들어 다른 집 닭보다 살찌고 알을 잘 낳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때로는 닭의 정경을 시로 지어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봐야 하느니,이야말로 책 읽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양계다. "
둘째형 약전에겐 제발 실질적이 되라고 부탁한다.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니요. 섬 안에 산개(山犬)가 수두룩할 텐데요. 하늘이 흑산도를 선생의 탕목읍(식읍지)으로 만들어줬는데도 스스로 고달픔을 택하다니 사정에 어두운 게 아니겠습니까. 들깨 한 말을 부치니 볶아 가루를 만드십시오.채소밭에 파가 있고 방에 식초가 있으면 이제 개를 잡을 차례입니다. "
영암군수 이종영에 대한 조언은 지금의 관리들도 기억할 만하다. "상관이 엄한 말로 나를 위협하는 것,간리가 조작한 비방으로 나를 겁주는 것,재상의 부탁으로 나를 더럽히는 것 등은 모두 내가 지금의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위는 빼앗길까 두려워할수록 지키기 어렵다. "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