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27일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연례 심포지엄이 열린 이곳에 세계 50여개국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였다.

시선은 벤 버냉키 미 FRB 의장에게 쏠렸다. 버냉키 의장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비전통적인 추가 부양책을 내놓겠다"며 '양적완화' 조치를 천명했다. 미국의 정책금리가 '0%'로 떨어져 추가 인하가 불가능한 만큼 돈을 더 풀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리겠다는 선언이었다.

와이오밍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중앙은행 총재들은 버냉키 의장의 발언을 '더블딥(경기 일시 회복 뒤 재침체)을 막기 위해 달러 약세를 유도하겠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달러 약세는 다른 나라 통화의 강세를 뜻한다. 미국은 특히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 위안화의 가치 절상을 겨냥했다.

◆1,2차 환율대전

환율대전의 중심에는 언제나 달러가 있었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패권국가가 된 미국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가 됐기 때문이다. 달러가 흔들리면서 세계 환율 체계도 소용돌이쳤다.

35달러를 갖고 오면 금 1온스를 내 주기로 주요 국가들과 합의한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는 20년간 큰 문제없이 유지됐다. 하지만 미국이 1950년대 유럽 재건과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내면서 문제가 생겼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 국가들이 달러를 믿지 못하겠다고 공격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을 기축통화로 삼자고 주장했다. 1차 환율대전(통화전쟁)이 터진 것이다. 미국은 몇 년을 버티다 1971년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없고,변동환율제로 전환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2차 환율대전은 미국의 '쌍둥이 적자'에서 비롯됐다. 1980년대 미국은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동시에 급격히 늘었고,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엔화가치를 절상시키는 쪽으로 마무리됐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다. 당시 엔화가치는 달러당 250엔에서 120엔으로 급격히 절상됐다.

◆3차 대전은 중국과의 싸움

환율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미국 금융위기의 직접적 계기는 주택시장의 버블이었다. 하지만 그 바탕엔 글로벌 무역 불균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 등 신흥시장국이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절하시킨 덕에 무역흑자를 봤고,반대로 미국은 무역적자와 일자리 감소에 허덕거리고 있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향후 5년간 수출 2배,일자리 200만개 창출'비전을 제시하고 나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에게 "중국이 환율 문제에 대해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미국은 3차 환율대전에서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하나는 환율조작 의심 국가에서 수입되는 상품에 보복관세를 매길 수 있는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개혁법안'이다. 다른 하나는 통화량 확대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1980년대 일본과의 환율전쟁 때는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여 합의를 이끌어냈다면 지금은 힘만으로는 안되는 형국"이라고 진단했다. 중국은 미국 하원이 보복법안을 통과시킨 29일 위안화 환율을 오히려 상승(위안화 절하)시켰다. 현재 중국의 환율제도는 정부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복수통화바스켓제도다.

◆신흥국 환율방어 안간힘

미국의 통화량 확대는 중국 이외 다른 국가의 통화가치를 밀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8월27일 버냉키 의장 발언 이후 9월29일까지 호주달러는 미국 달러 대비 9.3%나 뛰었다. 유로화가치도 6.9% 절상됐다. 신흥시장국의 통화가치 역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한국 원화도 이 기간 4.8% 올랐다.

급격한 엔화가치 절상으로 고통을 겪었던 일본은 몸이 달았다. 엔화가치가 달러당 82엔까지 치솟아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자 일본 당국은 9월15일 시장개입에 나섰다. 투입한 자금은 2조엔으로 사상 최대였다. 일본 당국은 시장개입에도 엔화가치 하락세가 소폭에 그치자 미국과 마찬가지로 돈을 직접 푸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4조6000억엔 규모(올해 일본 예산의 5%)의 추가경정 예산을 편성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