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다양성을 옹호했던 세기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문화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라는 전설적인 명언을 남긴 바 있다. 그로 인해 차별이 아닌 차이의 문제로 문화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태도와 시각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해져 갔다.

미래적 감각을 대변하는 창조자들의 세계에선 이제 문화예술이란 '차이'가 아닌 '차원'의 문제로까지 그 감각의 세계를 넓혀가고 있는 것 또한 응당해 보인다. 그것은 문화예술이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하나의 관념이 아니라 복합적인 실체이며 때론 그 실체가 만져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확실하고 분명한 실감으로부터 새로운 문화예술이 생성되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하나의 문화예술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일부이자 우리가 꿈꾸고자 하는 총체적인 다양성의 현 실태인 것이다. 이런 상황 앞에서 마르쿠제는 말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상황 안에서의 삶의 총체성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라고.

수없이 변종되고 진화하고 있는 문화의 다양성을 감각적으로 익히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것이다. 너무나 많은 문화의 세포들을 일일이 따져보고 접근하다가는 시간이 모자라 보인다. 그렇다고 제도화된 시스템이나 체계화된 감각만을 따라가려다 보면 본진으로 침투하기 전에 지쳐서 나가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전화 거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번호부가 무용지물인 것처럼,문화예술의 감각을 받아들이는 법을 모르는데 그 많은 문화예술의 일련번호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날것 그대로의 문화를 피부로 접해보고 그 낯섦과 다양성 앞에서 자신의 삶과 시각의 체액들을 다시 한번 각색해 보는 것,날것의 문화예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거기 있다.

날것은 새로운 문화예술을 접하는 하나의 입장권이다. 교통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여 가듯이 날것의 문화는 스스로의 에너지로 움직이면서 다른 날것들과 교집합을 끊임없이 형성해 간다. 때로 날것은 거칠고 비틀림이 존재하면서 삐걱거릴 수 있다.

하지만 날것은 인간이 하나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의 문화를 입체화하는 과정이다. 날것은 창조를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예술가들의 혁명이다. 혁명은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부로부터,하나의 울림으로부터 온다. 우리의 내면에서 시작되는 하나의 '문화지진' 그것이 날것이다. 날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에는,이미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새로운 문화예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뜨거운 혁명이 담겨 있는 것이다.

날것에는 끊임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날것에는 아직 시작되지 않는 이야기의 가능성이 무수히 담겨 있다. 날것에는 입체적인 감각들이 숨 쉬고 있고,날것에는 수많은 문화세포들이 꿈꾸고 있으며 열린 감각의 내재율이 흐르고 있다.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새로운 날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감각이다. 열린 감각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하고 열린 감각을 통해 새로운 복합문화체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날것의 감각을 다시 개발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날것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날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창조를 시작하려는 자들의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날것의 감각을 키우고 날것의 문화마인드로 다시 공감에 대해 새롭게 우리는 이야기할 때가 왔다. 날것에는 여전히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문화예술의 일기예보가 숨겨져 있다. 날것에는 세상을 바꾸는 마그마가 담겨 있다. 당신에게 있는 날것을 보여 달라.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을 감수성의 혁명가라 부를 것이다. 당신의 감수성은 새로운 공동체들을 만날 것이다.

김경주 < 시인·극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