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돈을 풀어 경기 침체를 막겠다는 '양적완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촉발된 환율전쟁은 글로벌 자금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2008년 9월 미국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올해 중반 남유럽 국가의 재정위기 때까지 글로벌 자금은 안전자산으로 도피하기에 바빴다. 글로벌 자금은 2년 가까이 안전자산의 대명사인 미국 달러와 일본 엔화 자산으로 대거 이동했다.

하지만 미국이 달러를 더 풀겠다고 발표하고 일본마저 양적완화에 나설 태세를 보이면서 글로벌 자금은 미국과 일본을 떠나 신흥시장국으로 대거 몰려들고 있다. 연 1~2% 수준의 초저금리에다 통화가치 하락마저 우려되는 미국이나 일본보다는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고 화폐가치 상승이 기대되는 신흥국 시장이 유망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신흥시장국의 주가와 채권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에 쇼크가 다시 나타날 경우 자금이 신흥국에서 대거 탈출,제2의 아시아 외환위기 등을 불러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동남아 · 남미 주가 급등

1990년대 복합불황에 빠졌던 일본이 2000년대 들어서면서도 경제회복 기미가 나타나지 않자 '와타나베 부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일본 내 개인투자자들(주로 주부)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일본이 제로(0)금리 시대에 접어든 데다 경제성장마저 이뤄지지 않자 일본에선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일본 내 자금을 빼내 성장성이 높은 신흥국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낮은 금리의 일본 자금을 빌려 다른 나라의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나타난 것도 이 무렵부터다.

미국이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직후 1조7000억달러 규모의 양적완화 조치를 편 데 이어 올해 하반기부터 2차 양적완화 준비에 들어가자 '달러 캐리 트레이드'도 본격화하고 있다. 일본도 4조6000억엔 규모의 추가경정 예산을 편성키로 했고 유럽연합(EU) 역시 재정위기가 발생할 경우 유동성을 추가 방출키로 한 상태여서 이들 국가에서도 캐리 트레이드가 나타날 조짐이다.

신흥국으로 흘러들어가는 돈은 지난 8월부터 급증하고 있다. 현대증권과 이머징포트폴리오펀드리서치(EPFR)에 따르면 글로벌 이머징마켓 주식형펀드는 6월 39억7500만달러,7월 50억9800만달러 증가한 데 이어 8월엔 83억5400만달러로 증가 규모가 확대됐다. 9월에도 22일까지 52억1600만달러가 순유입됐다.

이 여파로 최근 석 달간 아르헨티나(20.98%) 페루(27.76%) 등 남미 국가와 인도네시아(21.74%) 태국(22.74%) 등 동남아 국가의 주가가 20% 이상 뛰었다. 터키(19.11%)와 인도(15.5%)는 주가상승률이 15%를 웃돈다. 한국(코스피지수)과 중국(상하이종합지수)도 10% 이상 올랐다. 외국인은 한국 코스피시장에서 7월부터 10월1일까지 7조2000억원어치 이상의 주식을 사들였다.

반면 일본에 투자하는 글로벌 주식형펀드는 7월 11억3600만달러,8월 14억5100만달러가 빠져나간 데 이어 9월에도 22일까지 2억달러 이상 순유출됐다. 서유럽에 투자하는 글로벌 주식형펀드도 9월 들어 22일까지 15억8000만달러 감소했다.

◆채권시장도 '랠리'

채권시장의 양상도 비슷하다. 외국인 자금이 밀려들어오자 신흥국의 채권 금리가 빠른 속도로 하락(채권가격은 상승)했다. 브라질의 5년짜리 국채 금리는 최근 두 달 새 연 12.18%에서 연 12.03%로 떨어졌다. 동남아 지역에선 3년 만기 국채 기준으로 인도네시아가 연 7.36%에서 연 6.74%,필리핀이 연 5.15%에서 연 4.76%로 금리가 급락했다.

이들 국가보다 국채 금리가 더 가파르게 떨어진 곳이 한국이다. 5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최근 두 달 동안 연 4.42%에서 연 3.57%로 하락했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10월1일 연 3.26%로 2004년 12월7일의 사상 최저치(연 3.24%) 경신을 눈앞에 뒀다.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와 20년 만기 국고채 금리 역시 이 기간 각각 0.86%포인트와 0.81%포인트 떨어졌다. 20년 만기 국고채 금리(연 4.24%)는 사상 최저이며 10년 만기 국고채 금리(연 4.0%)는 6년10개월 만에 최저치다. 외국인이 한국 채권(주로 국채)을 사들인 규모는 최근 두 달간 10조7800억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반전되는 경우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외국인의 '바이 코리아'가 이어졌지만 리먼 사태가 터지자 자금이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이때부터 2008년 말까지 한국에서 탈출한 외국인 자금은 500억달러에 이른다. 리먼 사태의 불똥이 한국에선 외화유동성 위기로 나타난 이유다. 김태준 금융연구원장은 "한국 시장에선 지나친 쏠림이 늘 위기를 불러 온 측면이 있다"며 "이번 환율전쟁에서도 외환당국은 과도한 변동성을 줄여 자본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