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인 이 대리(여)는 입사 직후부터 매달 20만원씩 꼬박꼬박 저축한다. 혼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1년이 지날 때마다 돈을 찾는다. 그리곤 미련없이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산다. 1년동안 수고한 자신을 스스로 '치하'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이 대리의 씀씀이가 헤픈 것은 아니다. 짠순이도 그런 짠순이가 없다. 그런데도 매년 수백만원짜리 명품가방을 사는 것을 보고 친구들은 깜짝 놀란다. 이 대리는 "평범한 월급쟁이에겐 명품이 직장 생활에 동기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며 "명품계(契)를 하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한 케이블 TV 방송에서 한 여성이 "부모가 준 용돈으로 사서 몸에 걸치고 있는 명품만 4억원"이라고 말해 화제가 됐다. 진실이든,아니든 이른바 '명품족'을 직장에서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황이다. 이로 인해 생기는 위화감도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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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명품족

대기업에 다니는 P대리(32)는 언뜻보면 수수하다. 뜯어보면 아니다. 그가 착용한 '위블로' 시계는 2000만원짜리다. 벨트 구두 정장 등 몸에 걸친 것들을 추산해 보면 얼추 3000만원어치는 된다. 차도 BMW5 시리즈다. P대리가 명품을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부모 덕분.상당한 재력가인 부모가 '튀지 않게 꾸미는 조건'으로 명품 구입을 지원해주고 있어서다.

그래서일까. 얼핏 봐서는 그의 액세서리에서 명품 브랜드를 찾을 수 없다. 눈에 띄지 않게 감추고 다녀서다. 그렇지만 분위기만은 명품이다. 그와 함께 일하는 M대리는 "그에게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명품 '아우라(분위기)' 때문에 그가 입은 지오다노 면바지조차 명품처럼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L대리(33)는 '생계형 명품족'이다. 얼마 전 고민 끝에 '셀린느'가방을 장만했다. 탤런트 고소영이 신혼여행 갈 때 들어서 화제가 된 가방이다. 문제는 로고가 금박으로 작게 새겨져 있다는 점.그러다보니 팔에 걸쳤을 때 로고가 보이지 않곤 한다. 이를 막기 위해 로고가 밖으로 향하도록 고쳐메곤 한다. L대리는 "명품가방 하나를 장만하면 어떡하든 이를 알리고 싶은 게 대부분 월급쟁이들의 속성"이라며 계면쩍게 웃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K과장은 나름대로 명품족을 자처하는 사람이다. 그가 차고 있는 시계와 입고 있는 양복 모두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브랜드다. 하지만 팀내 누구도 그를 명품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김치냄새와 담배냄새 등 입냄새가 지독하다. 머리도 멋을 낸다고 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다. 하는 행동도 명품족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K과장이 진짜 명품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하는 행동만 보면 짝퉁임에 틀림없다"고 수군댄다.

◆나는 다쳐도 '내 가방'만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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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 다니는 K대리(32)의 동기는 얼마 전 450만원이 훌쩍 넘는 샤넬백을 7개월 할부로 샀다. 출혈이 컸던 탓에 그 이후로 동기 및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 먹고 있다. 어느 날 비가 쏟아지자 K대리의 동기는 샤넬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냈다. 검은 비닐봉지였다. 그는 비닐로 가방을 뒤집어씌우며 "내가 비를 쫄딱 맞는 한이 있더라도 가방만은 비를 맞게 할 순 없다"며 소중히 가방을 품에 안고 귀가했다.

한 마케팅회사에 다니는 H씨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나는 다쳐서 샤넬을 살렸다"는 무용담을 퍼뜨리고 다닌다. 양가죽이라 긁힘에 약한 샤넬 가방을 '모시고' 가던 중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진 것.그는 바로 가방을 끌어 안았다. 그의 무릎과 팔꿈치 등에는 피멍과 상처가 남았지만 샤넬은 무사했다.

◆남편들 "해외 출장 안 가면 안 되나요?"

대부분 남성 직장인들에게 명품은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생일 때 받은 지갑과 벨트 정도가 남성 직장인의 명품 아이템이다. 그러나 명품이 대중화되면서 중장년층 직장인들은 출장을 갈 때마다 아내가 적어주는 가방 지갑 화장품 등 명품 목록에 머리가 빠질 지경이다.

국내 대기업에 근무하는 K과장(37)은 얼마 전 결혼 5주년을 맞아 아내가 수년 전부터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샤넬 핸드백을 사주기로 했다. 마침 출장을 가게 돼 아내는 "이런 저런 체인이 달린 가방을 사오라"고 '주입'했다. 해외 공항 면세점에 들어선 K과장은 점원에게 '체인 백'을 달라고 했고 점원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겨우 물건을 산 뒤 의기양양하게 선물을 내밀었다. 그러나 웬걸.그것은 아내가 갖고 싶었던 디자인이 아니었다. 그는 "돈은 돈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먹었다"며 "명품 사는 건 보물 찾기 수준"이라고 말했다.

◆명품족?아니죠,'마니아'죠!

외제 명품은 '특정 계층'만 사용한다는 시선이 억울하다는 직장인도 있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J과장(36)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동차라면 사족을 못쓰는 자동차 마니아다. 인터넷 카페와 동호회,전문 잡지에도 수차례 기고할 정도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자랑한다. 그러던 그가 최근 구입한 차 때문에 고민이 생겼다. 벼르고 별러 구입한 외제차는 세금을 다 뗀 가격이 1억여원.부유층 전용이라는 인식이 강한 브랜드인 데다,최근 사장까지 경비 절감을 내세우며 차를 국산 중고차로 바꿔 주차장에만 모셔두게 됐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걸 사기 위해 25년간 모은 돈을 쏟아부은 게 무슨 죄가 되느냐"고 반문했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

명품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 명품족을 무리하게 따라가려다 낭패를 보기도 한다. 전직 패션기자인 K씨(35)는 주변에 명품족이 허다하고 명품 관련 기사를 많이 쓰다보니 월급이나 형편에 비해 많은 돈을 명품을 구입하는 데 썼다. K씨는 "명품 업체 사람을 만날 땐 반드시 그 브랜드 가방을 들고 가 주는 게 예의이고 명품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며 합리화하다보니 월세를 살면서도 수백만원짜리 옷과 가방들을 줄줄이 사게 됐다. 어느 날 피치못할 사정으로 퇴사를 한 K씨.그는 "회사를 그만두니까 남은 건 마이너스 몇천만원짜리 통장밖에 없더라"며 "뭐에 홀렸었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강유현/이관우/김동윤/이상은/이고운 기자 yhkang@hankyung.com

▷이 기사는 독자 toystar111 님이 제공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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