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환경적응업이라고들 한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는 만큼 빨리 제대로 적응하는 회사가 승리한다는 뜻이다. 작은 변화를 살피고 스스로 먼저 압박을 느끼며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 기업이 오래 살아남는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는 새로운 변화의 화두는 단연 '상생'이다. 품질 기술 혁신 등 예전의 경영 화두와는 전혀 다른 키워드다. 처음 논의가 시작된 지난 8월만 해도 강건너 불보듯 여유를 부리던 대기업들도 최근에는 비상이 걸렸다. 원칙을 강조하는 수준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차명계좌 수사가 들이닥치고 각 부처들이 앞다퉈 상생 관련 규제정책을 내놓고 있어서다.

관전자의 시각으로 보면 상생을 둘러싼 최근 상황들은 정부와 경제계 간에 상당한 인식차가 있다는 증거다. 일단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은 지나치게 과거의 시각으로 정부 정책을 보는 측면이 있다. '기업 군기 잡기' 정도로 해석해 울며 겨자 먹기로 대응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로서도 그런 오해를 살 행동을 한 면이 분명히 있다. 자발성이 중요한 협력업체 문제에 대해 규제정책을 쏟아내며 지나치게 밀어붙인다는 지적을 면할 길이 없게 돼 있다.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포함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논의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세계적으로 CSR에 대한 국제규범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이미 구체화됐고 새로운 표준인 ISO26000이 이르면 연내에 발효돼 국제무역에서 새로운 비관세 장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예상되고 있는 상태다.

이런 변화에서 기회를 잡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기업의 속도는 너무 늦고 정부의 채근 강도는 너무 강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실제 지난 1월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국내 100대 기업 가운데 ISO26000 대응전략을 갖춘 기업은 5% 정도에 그치고 있다.

다행히 이런 오해를 줄일 길이 생겼다. 정부 핵심부에서 상생 화두를 마련하며 '스터디'했다는 소위 '4대 교과서'의 존재가 최근 알려졌다. 외국 석학들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위대한 기업을 넘어 사랑받는 기업으로》(라젠드라 시소디어),《위험 사회와 새로운 자본주의》(파울 놀테),《공유의 비극을 넘어》(엘리너 오스트롬) 등이다. 이 가운데 오스트롬만 제외하고는 올 들어 저자들이 이런저런 기회로 방한 세미나를 가졌다.

이 네 권 책의 키워드들을 요약해보면 '정의' '공정' '도덕' '옳은 일' '공동선' '네트워크' '이해당사자' '사랑' '감성' '공동체적 연대' '책임' '미래 투자' '지속 가능한 미래' '환경' 등이다. 기업들이 붙잡아온 화두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새로운 키워드들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경쟁 우선, 순익 우선의 과거논리에서 협업 장려,목적 중심의 것으로 변했으니 성공 논리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을 이 책들은 강조하고 있다.

최근 정부는 관련 정책을 발표하면서 상생이라는 말 대신 '동반 성장'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일방적 시혜를 뜻하는 상생이라는 말에 비해 '동반 성장'은 기업 프렌들리의 정서가 살아 있다. 어찌 됐든 '분배'보다는 '성장'에 초점을 둘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어서 의미 있는 변화다.

환경 변화는 좋으냐 싫으냐가 아니라 어떻게 적응할 것이냐의 문제다. 큰 흐름을 읽고 방향을 찾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권영설 한경아카데미원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