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 기행] (22) 프랑스 왕 대관식마다 터뜨린 샴페인, 처음엔 거품이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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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프랑스 랭스
축하의 상징 '샴페인' 도시
17세기 동 페리뇽 수사…거품 만드는 '이중발효' 발명, 오늘날 같은 샴페인 탄생
대관식 열렸던 노트르담 대성당…2300개 정교한 조각작품 유명
축하의 상징 '샴페인' 도시
17세기 동 페리뇽 수사…거품 만드는 '이중발효' 발명, 오늘날 같은 샴페인 탄생
대관식 열렸던 노트르담 대성당…2300개 정교한 조각작품 유명
나도 멋지게 샴페인을 터뜨린 적이 있다. 4년 전 파리에서였다. 박사학위 논문 통과 확정 이후 심사위원과 하객들을 위해 조촐한 파티를 열었는데 그때 난생 처음 샴페인을 터뜨린 것이다. 마개를 따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거품이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브라보'를 외쳤다. 그때 나의 기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샴페인의 용솟음치는 거품은 주체할 수 없는 나의 감정을 시원하게 대신 분출해줬다. 그것은 희열의 거품이었다.
프랑스인들이 축하 파티에 항상 샴페인(프랑스어로 샹파뉴)을 터뜨리는 이유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음식을 차려도 품격 있는 샴페인이 빠지면 제대로 된 잔치로 인정받지 못한다. 마치 전라도 잔치에서 홍어회가 빠지면 잔치 취급을 받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샴페인은 잔치의 상징인 것이다.
샴페인은 프랑스의 동북쪽,독일과 국경을 면한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하는 거품이 이는 와인을 말한다. 그 산지의 중심은 랭스다. 기원전 갈리아인들이 세운 이 도시는 로마제국 편입 후 크게 번성했다. 이는 로마인들이 이곳에 가져다 심은 포도나무 덕분이었다. 랭스 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이탈리아산 와인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게다가 랭스는 파리와 독일의 라인 지역을 잇는 동서 교역로와 플랑드르(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스위스를 잇는 남북 교역로의 교차점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업고 무역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 이점은 이곳을 이웃나라들의 각축장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랭스가 와인 중심지가 된 것은 카페왕조의 창시자인 위그 카페가 987년 이곳에서 등극한 이후 역대 왕들이 이곳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것에서 비롯했다. 프랑스 왕들은 대관식과 그 축하 행사에 샹파뉴산 와인을 사용했고 덕분에 상파뉴산 와인은 이후 최고의 권위를 지닌 고급 와인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초기 샹파뉴 와인은 거품이 없는 전통적인 레드와인과 다를 게 없었다.
언제부터 거품이 이는 와인이 생겨난 것일까? 여기에는 17세기 후반 오빌레르 수도원에서 식료를 담당했던 동 페리뇽 수사의 이중발효법 발명이 큰 몫을 했다. 채취한 포도를 우선 1차 발효시킨 후 다시 병에 부어 이스트와 설탕을 넣어 밀봉한 후 2차 발효를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거품이 발생해 오늘날의 샴페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와인은 처음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필리프 2세가 애호하면서 귀족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샴페인의 도시 랭스는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었던 만큼 역사적 명소도 많다. 모두 25명의 왕이 왕관을 썼던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1211년 첫삽을 뜬 이래 네 명의 건축가가 바통을 이어받아 1287년 베르나르드 수아송에 의해 완공됐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함께 전성기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이 성당은 쉬제르라는 천재가 창안해낸 첨두아치(아치의 끝을 뾰족하게 처리한 것)를 적용했다. 38m나 쌓아올린 높다란 실내가 종교적 엄숙함을 자아냄은 물론 높고 길다란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사한 빛이 신의 자애로운 손길처럼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건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성당 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2303개의 정교한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파사드 중앙정문 오른쪽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을 묘사한 '수태고지'는 중세 조각이 전기인 로마네스크 시기의 추상성을 탈피해 사실적인 모습으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가브리엘의 우아한 미소는 너무나 아름답다.
노트르담 대성당 바로 아래 자리한 토 궁전은 주교가 거처하던 곳으로 대관식 때는 왕과 왕비가 머물렀다. 대관식 후 새 왕은 이곳의 연회장에서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한다. 현재 이 궁전에는 대관식 때 사용했던 성배를 비롯해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 조각을 보관하는 성구함 등이 전시돼 있다.
성당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ㅁ'자형으로 건물이 배치된 루와얄 광장이 나타난다. 가브리엘 르장드르가 설계한 이 광장은 1757년 건설에 착수했다가 미완성인 상태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맞아 광장 중앙의 루이 15세 동상과 함께 파괴됐다. 동상은 곧 복구됐지만 광장은 1910년 소시에테제네랄은행이 비용을 댐으로써 겨우 되살아났다.
랭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례없는 전쟁의 참화를 겪는다.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샴페인의 원료인 포도농장도 초토화됐다. 노트르담 대성당 역시 참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14년 9월19일 성당에 폭탄이 떨어지던 날 성당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던 '미소 띤 천사상'도 큰 부상을 입었다. 폭격에 의한 화재로 성당의 골조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천사의 머리 부분이 잘려 나간 것.이튿날 쥘 티노 신부는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며 현장에서 20여 조각으로 부서진 천사상의 파편들을 수거했다. '미소 띤 천사상'은 이듬해 건축가 막스 생소류가 발견해 프랑스 정신과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문화유산의 상징으로 전시 대외 선전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소를 잃은 천사상은 파리 트로카데로 궁전에 보관돼 있던 거푸집을 이용해 복원했고 1926년 2월13일 본래의 우아한 미소를 되찾았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랭스가 다시 일어선 것은 포도주 산업 덕분이었다. 그러나 번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랭스는 다시 수난을 겪어야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번에도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천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1945년 5월7일 새벽 독일군은 랭스에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튿날 아침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포머리 빈티지의 샴페인 6상자를 터뜨리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한 역사가는 종전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선의 마지막 폭발음,그것은 곧 (승리를 축하하는) 샴페인 마개가 터지는 소리였다. "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럭셔리부터 로맨틱까지 화려한 카멜레온 마케팅
오늘날 샴페인은 더 이상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쁜 날이면 누구나 샴페인을 터뜨릴 만큼 대중화했다. 여기에는 랭스를 중심으로 한 샴페인 업자들의 기막힌 판촉 전략이 숨어 있다. 그들의 마케팅 전략은 한마디로 '카멜레온 마케팅'이라고 할 만하다.
처음에 샴페인 업자들은 왕과 귀족이 마시는 음료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명품 샴페인의 하나인 '로랑-페리에'는 1890년대 광고에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가 자신들의 샴페인을 즐겨 마신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동시에 샴페인은 누구나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럭셔리한 음료의 하나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런 전략은 대중을 파고드는 데 성공해 20세기에 들어서면 중산계층 남성 대부분이 샴페인 고객으로 편입된다.
랭스의 업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여성들마저도 톡 쏘는 샴페인의 포로로 만들기 위해 묘책을 짜낸다. 이번에도 선두주자는 로랑-페리에였다. 이 회사는 여성들에게 더블리 백작부인과 톨마슈 남작부인이 샴페인 애호가라고 속삭였다. 상표에다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의 이미지도 삽입했다. 결국 여성들도 샴페인 업자들의 수완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들이 노리는 다음 타깃이 누구일지 자못 궁금하다.
프랑스인들이 축하 파티에 항상 샴페인(프랑스어로 샹파뉴)을 터뜨리는 이유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프랑스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음식을 차려도 품격 있는 샴페인이 빠지면 제대로 된 잔치로 인정받지 못한다. 마치 전라도 잔치에서 홍어회가 빠지면 잔치 취급을 받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샴페인은 잔치의 상징인 것이다.
샴페인은 프랑스의 동북쪽,독일과 국경을 면한 샹파뉴 지역에서 생산하는 거품이 이는 와인을 말한다. 그 산지의 중심은 랭스다. 기원전 갈리아인들이 세운 이 도시는 로마제국 편입 후 크게 번성했다. 이는 로마인들이 이곳에 가져다 심은 포도나무 덕분이었다. 랭스 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이탈리아산 와인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게다가 랭스는 파리와 독일의 라인 지역을 잇는 동서 교역로와 플랑드르(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스위스를 잇는 남북 교역로의 교차점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업고 무역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 이점은 이곳을 이웃나라들의 각축장으로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랭스가 와인 중심지가 된 것은 카페왕조의 창시자인 위그 카페가 987년 이곳에서 등극한 이후 역대 왕들이 이곳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것에서 비롯했다. 프랑스 왕들은 대관식과 그 축하 행사에 샹파뉴산 와인을 사용했고 덕분에 상파뉴산 와인은 이후 최고의 권위를 지닌 고급 와인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초기 샹파뉴 와인은 거품이 없는 전통적인 레드와인과 다를 게 없었다.
언제부터 거품이 이는 와인이 생겨난 것일까? 여기에는 17세기 후반 오빌레르 수도원에서 식료를 담당했던 동 페리뇽 수사의 이중발효법 발명이 큰 몫을 했다. 채취한 포도를 우선 1차 발효시킨 후 다시 병에 부어 이스트와 설탕을 넣어 밀봉한 후 2차 발효를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거품이 발생해 오늘날의 샴페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와인은 처음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필리프 2세가 애호하면서 귀족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샴페인의 도시 랭스는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열린 곳이었던 만큼 역사적 명소도 많다. 모두 25명의 왕이 왕관을 썼던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1211년 첫삽을 뜬 이래 네 명의 건축가가 바통을 이어받아 1287년 베르나르드 수아송에 의해 완공됐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함께 전성기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이 성당은 쉬제르라는 천재가 창안해낸 첨두아치(아치의 끝을 뾰족하게 처리한 것)를 적용했다. 38m나 쌓아올린 높다란 실내가 종교적 엄숙함을 자아냄은 물론 높고 길다란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사한 빛이 신의 자애로운 손길처럼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건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성당 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2303개의 정교한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파사드 중앙정문 오른쪽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을 묘사한 '수태고지'는 중세 조각이 전기인 로마네스크 시기의 추상성을 탈피해 사실적인 모습으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가브리엘의 우아한 미소는 너무나 아름답다.
노트르담 대성당 바로 아래 자리한 토 궁전은 주교가 거처하던 곳으로 대관식 때는 왕과 왕비가 머물렀다. 대관식 후 새 왕은 이곳의 연회장에서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한다. 현재 이 궁전에는 대관식 때 사용했던 성배를 비롯해 예수 그리스도의 면류관 조각을 보관하는 성구함 등이 전시돼 있다.
성당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ㅁ'자형으로 건물이 배치된 루와얄 광장이 나타난다. 가브리엘 르장드르가 설계한 이 광장은 1757년 건설에 착수했다가 미완성인 상태에서 프랑스 대혁명을 맞아 광장 중앙의 루이 15세 동상과 함께 파괴됐다. 동상은 곧 복구됐지만 광장은 1910년 소시에테제네랄은행이 비용을 댐으로써 겨우 되살아났다.
랭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례없는 전쟁의 참화를 겪는다.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샴페인의 원료인 포도농장도 초토화됐다. 노트르담 대성당 역시 참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14년 9월19일 성당에 폭탄이 떨어지던 날 성당 파사드를 장식하고 있던 '미소 띤 천사상'도 큰 부상을 입었다. 폭격에 의한 화재로 성당의 골조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천사의 머리 부분이 잘려 나간 것.이튿날 쥘 티노 신부는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며 현장에서 20여 조각으로 부서진 천사상의 파편들을 수거했다. '미소 띤 천사상'은 이듬해 건축가 막스 생소류가 발견해 프랑스 정신과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문화유산의 상징으로 전시 대외 선전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소를 잃은 천사상은 파리 트로카데로 궁전에 보관돼 있던 거푸집을 이용해 복원했고 1926년 2월13일 본래의 우아한 미소를 되찾았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랭스가 다시 일어선 것은 포도주 산업 덕분이었다. 그러나 번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랭스는 다시 수난을 겪어야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이번에도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천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1945년 5월7일 새벽 독일군은 랭스에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튿날 아침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포머리 빈티지의 샴페인 6상자를 터뜨리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한 역사가는 종전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선의 마지막 폭발음,그것은 곧 (승리를 축하하는) 샴페인 마개가 터지는 소리였다. "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럭셔리부터 로맨틱까지 화려한 카멜레온 마케팅
오늘날 샴페인은 더 이상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쁜 날이면 누구나 샴페인을 터뜨릴 만큼 대중화했다. 여기에는 랭스를 중심으로 한 샴페인 업자들의 기막힌 판촉 전략이 숨어 있다. 그들의 마케팅 전략은 한마디로 '카멜레온 마케팅'이라고 할 만하다.
처음에 샴페인 업자들은 왕과 귀족이 마시는 음료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노력했다. 명품 샴페인의 하나인 '로랑-페리에'는 1890년대 광고에서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가 자신들의 샴페인을 즐겨 마신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동시에 샴페인은 누구나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럭셔리한 음료의 하나라는 점도 강조했다. 이런 전략은 대중을 파고드는 데 성공해 20세기에 들어서면 중산계층 남성 대부분이 샴페인 고객으로 편입된다.
랭스의 업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여성들마저도 톡 쏘는 샴페인의 포로로 만들기 위해 묘책을 짜낸다. 이번에도 선두주자는 로랑-페리에였다. 이 회사는 여성들에게 더블리 백작부인과 톨마슈 남작부인이 샴페인 애호가라고 속삭였다. 상표에다 로맨틱한 사랑과 결혼의 이미지도 삽입했다. 결국 여성들도 샴페인 업자들의 수완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들이 노리는 다음 타깃이 누구일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