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공정한 정부보다 당당한 정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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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번영이 분배 앞서는 가치…명분에 휘둘려 눈치 봐선 안돼
어떤 주장의 진의를 파악하려면 그것을 담은 언어가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 절대선(絶對善)으로 포장된 언어의 마법에 주의해야 한다. 이면에 숨겨진 실제적 의미를 은근히 축소시키고 외관적 의미만 확대 해석해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적 남북통일을 위해 남북이 화해 협력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쪽에만 군사력 감축과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우는 경우가 그것이다. 여기에 민족 자주와 외세 배격의 명분이 가세한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력은 묵인하면서,한국내의 무력 억제와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요즈음 회자되고 있는 '공정'도 마찬가지다. '공정한 사회'는 학자들의 담론이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이 누구나 공감하는 절대선이다. 그러나 공정이 분배의 문제로 귀착됐을 경우,공정의 의미가 왜곡되는 것은 물론 사회발전 동력을 저하 · 상실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실 공정의 문제는 '분배'와 같은 사회적 이슈보다는 개인적 덕목에서 출발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공정한 사회는 분배의 공정이 아니라 행위의 공정성인 황금률('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윤리관)을 존중해야 한다(본지 2010년 9월7일 A39면 시론).하지만 황금률과 같은 개인 행위규범이 공정한 사회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황금률이 보편적 도덕률이긴 하지만,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상황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실행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황금률 적용이 의미 없는 실제 상황이 존재하므로 이에 전적으로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공정한 사회,공정한 정부보다는 정당한 정부와 시민의식이 더 필요하다. 소외계층이나 분배의 문제를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 존립,생존,번영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민심의 향배나 지지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그것이 국가 운영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중도,공정,평화 등은 절대선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로 실행력을 확보할 수 없는 외관상의 선(善)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사유재산의 존중,자조,법치와 같은 덕목들이다. 이들은 일반 대중들에게 인기는 없을지 몰라도 정당한 정부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다.
정당한 정부는 당당한 정부이다. '공정'을 명분으로 해 눈치 보는 정부가 아니다. 당당한 정부가 어떤 것인가는 현 정부에서 일어난 몇 가지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현 정부는 감세(減稅)를 대선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그러나 임기 후반에 접어든 이즈음 현실은 감세정책과 반대로 가고 있다. 더욱이 개탄스러운 것은 초반부터 '부자(富者) 감세'라는 야당의 계속된 비판에 직면해 '감세가 성장 동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종국에는 모두에게 과실이 돌아간다'는 점을 설득하고 제대로 대응한 것을 보지 못했다.
같은 맥락에서 4대강 사업의 당위성을 떳떳하게 설득한 것을 기억하는 국민은 별로 없다. 선거 때 내걸었던 대운하 사업의 축소라는 의구심도 해소시키지 못했다. 결국 임기 내내 4대강 사업으로 야당의 비판에 끌려다니는 실정이다. 교육 분야에서도 자율과 경쟁을 제고한다고 했지만 단위학교와 대학의 자율성이 신장됐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자율과 선택'을 생색만 내는 고교선택제나 정부가 도입을 장려한 입학사정관제는 오히려 국가 간섭의 도를 심화시켰을 뿐이다.
현 정부가 포퓰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은 중도실용,친(親)서민,공정을 내세우며 눈치 보는 정부이기 때문에 계속 나온다. 당당한 자세를 견지해 공정한 사회를 추구할 일이다. 공정이란 명분이 공정한 사회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김정래 < 부산교대 교육학 교수 >
요즈음 회자되고 있는 '공정'도 마찬가지다. '공정한 사회'는 학자들의 담론이 아니더라도 일반인들이 누구나 공감하는 절대선이다. 그러나 공정이 분배의 문제로 귀착됐을 경우,공정의 의미가 왜곡되는 것은 물론 사회발전 동력을 저하 · 상실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사실 공정의 문제는 '분배'와 같은 사회적 이슈보다는 개인적 덕목에서 출발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공정한 사회는 분배의 공정이 아니라 행위의 공정성인 황금률('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윤리관)을 존중해야 한다(본지 2010년 9월7일 A39면 시론).하지만 황금률과 같은 개인 행위규범이 공정한 사회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황금률이 보편적 도덕률이긴 하지만,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상황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실행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황금률 적용이 의미 없는 실제 상황이 존재하므로 이에 전적으로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공정한 사회,공정한 정부보다는 정당한 정부와 시민의식이 더 필요하다. 소외계층이나 분배의 문제를 외면하자는 것이 아니라 국가 존립,생존,번영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민심의 향배나 지지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그것이 국가 운영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중도,공정,평화 등은 절대선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로 실행력을 확보할 수 없는 외관상의 선(善)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사유재산의 존중,자조,법치와 같은 덕목들이다. 이들은 일반 대중들에게 인기는 없을지 몰라도 정당한 정부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다.
정당한 정부는 당당한 정부이다. '공정'을 명분으로 해 눈치 보는 정부가 아니다. 당당한 정부가 어떤 것인가는 현 정부에서 일어난 몇 가지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현 정부는 감세(減稅)를 대선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그러나 임기 후반에 접어든 이즈음 현실은 감세정책과 반대로 가고 있다. 더욱이 개탄스러운 것은 초반부터 '부자(富者) 감세'라는 야당의 계속된 비판에 직면해 '감세가 성장 동력을 해치지 않으면서 종국에는 모두에게 과실이 돌아간다'는 점을 설득하고 제대로 대응한 것을 보지 못했다.
같은 맥락에서 4대강 사업의 당위성을 떳떳하게 설득한 것을 기억하는 국민은 별로 없다. 선거 때 내걸었던 대운하 사업의 축소라는 의구심도 해소시키지 못했다. 결국 임기 내내 4대강 사업으로 야당의 비판에 끌려다니는 실정이다. 교육 분야에서도 자율과 경쟁을 제고한다고 했지만 단위학교와 대학의 자율성이 신장됐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자율과 선택'을 생색만 내는 고교선택제나 정부가 도입을 장려한 입학사정관제는 오히려 국가 간섭의 도를 심화시켰을 뿐이다.
현 정부가 포퓰리즘에 빠졌다는 비판은 중도실용,친(親)서민,공정을 내세우며 눈치 보는 정부이기 때문에 계속 나온다. 당당한 자세를 견지해 공정한 사회를 추구할 일이다. 공정이란 명분이 공정한 사회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김정래 < 부산교대 교육학 교수 >